Journal Information

Article Information


상호존재신론에서 보는 기도와 영성: 새로운 종교이해 전망을 위한 시론*

 

Abstract

본 논문의 목적은 그리스도교의 기도의 의미를 ‘상호존재신론(interbeingtheism)’ 이라는 새로운 신관으로 재조명하는 데에 있다. 전통적으로 기도 는 서양 그리스도교의 이원론적인 신관에 기초하여 기도하는 ‘나’와 기 도 받는 ‘신’을 분리하여 기도의 주체가 신을 대상화 하여 자신의 소원 을 이루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무한한 하느님을 유한 한 대상이나 사물로 환원하여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는 기도는 그 자체 가 ‘기도의 우상숭배화’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신과 세계를 불이론적인 관점에서 조명하는 상호존재신론의 기도는 그 본질과 지향성의 측면에 서 이원론적 신관에 기초한 기도와는 차원적으로 거리가 있다. 이 기도 는 만유일체론의 입장에서 만물의 상호연관성의 신비를 드러내는 이른 바 ‘기도 = 타자되기’라는 공리를 통해 자애심과 사랑을 추구하고 전체 를 지향한다. 다른 한편, ‘영성적’ 속성이 강한 이 불이론적 기도는 탈근 대 사회의 실존 환경에서 나타나고 있는 ‘주관적 전환’ 현상과 맞물려 촉발되고 있는 지구적 수준의 ‘영성적 전환’ 현상과 잘 조응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Translated Abstract

Depending on a new theistic view of 'interbeing-theism', this essay aims to re-examine the meaning of Christian prayer. Traditionally, prayer has been developed in such a way that, based on the dualistic theism of Western-centric Christianity, divides prayer 'I' and the beneficiary of prayer, 'God', and the subject of prayer objectifies God and fulfills his or her wish. However, the prayer of reducing the infinite God to a finite object or thing and projecting his desire can itself be an 'idolatrization of prayer'. However, the prayer of interbeing-theism with non-dualistic perspective on God and the world is dimensionally distant from the prayer based on the dualistic theism in terms of its nature and direction. From the holistic standpoint, this non-dualistic prayer seeks for love and charity and for the whole through the axiom of the so-called "prayer = being the other" which reveals the mystery of the interconnectedness of all things. Consequentially, this non-dualistic prayer with strong 'spiritual' attribute is understood to echo well with the 'spiritual turn' phenomena across the world generated by the 'subjective turn' in the existential conditions of the postmodern society.


관심과 조망

I.

그리스도교에서 기도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기도는 성 직자가 없어도, 설교나 강론이 없어도, 성례전과 찬양이 없어도, 그 리고 성전이 없어도 지금까지 존속해 왔다. 오리겐, 터툴리안, 니사 의 그레고리, 시프리안, 테오도르, 어거스틴 등 초대 교부들은 기도 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주기도문을 강해를 통해 기도를 가르치고 강조했다(스피어, 1990: 7-8).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는 기도가 차지 하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기도가 올바로 행해지지 못하고 있고 여 러 가지 방법적 접근에서 기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지 못한 실정 이다.

기도에 대한 국내의 연구들은 대부분 그리스도교와 연관해 이루 어 졌다. 하지만 종교 간 또는 타 종교와 연관해 이뤄진 연구는 거 의 전무하다. 그 이유는 한국 신학이 아직까지도 서양 그리스도교 신학의 틀 구조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며, 한국 교회가 타 종 교에 대해 품고 있는 배타성 때문이다. 국내의 종교 간 기도에 관한 비교 연구의 예로는, 불교명상과 천주교 관상기도 경험을 현상학적 으로 비교 검토한 연구(김혜옥, 2016), 원불교의 21자 주문과 주기도 문의 상징성과 소통성에 대한 연구(김동호, 2011), 그리고 그리스도 교(개신교)와 불교의 기도를 언어학적으로 비교한 연구(강현석, 2013; 2012) 등이 있다. 아주 드문 경우이지만, 그리스도교의 기도와 유교 의 경(敬)과 성(誠)을 비교 검토한 연구도 있다(강지연, 2017; 2012).

하지만 기도에 관한 근본적 문제는 그리스도교 자체의 신학적 전 제와 관련해서도 드러난다. 곧, 기도가 아주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 기도가 올바르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서양 그리스도교 중심의 일방적인 신 이해에서 비롯된 편향된 신관에서 기인한다. 서 양 그리스도교의 신관은 신과 세계를 둘로 나누어 신의 초월성만을 강조함으로써 신의 내재성을 약화시킨 이원론적인 신관이다. 신을 저 너머, 바깥에 홀로 있는 전지전능한 인격적 존재자로 상정하고 세계에 개입하는 신으로 이해한다. 이렇게 신과 세계가 철저히 분리 된 이원화된 신관에서 기도는 개인이나 집단이 원하는 바를 신을 통해서 이루는 욕망의 매개체가 된다. 신은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기 도 하고 응답하지 않기도 하는 선별적 신으로 전락된다.

이렇게 이원론적 신관에 뿌리를 둔 기도의 개념은 그 의미론적 및 실천적 차원에서 점점 더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 따라서 본 글에 서는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에 뿌리를 둔 초월적 유신론의 관점의 경계를 넘어 불이론적인 신관의 관점에서 기도의 의미를 새롭게 조 명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전환적 기도의 개념과 밀 접하게 연관된 영성적 전환 현상을 논의해 보고자 한다. 20세기 후 반이후 목도되는 영성에 대한 세기적 관심의 증대 현상은 전통적 종교관 및 신관의 전망체계를 통해서는 설득력 있는 설명을 구하기 어렵다. 하비 콕스는 영성에 대한 세기적 관심의 증대 현상을 두고 ‘영의 시대(age of spirit)’라고 규정한다(하비 콕스, 2009). 이 세기적 수준의 영성적 전환 현상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일종의 종교적 혁신이나 변용의 일환으로 보아, 결국 전통적 의미의 종교를 대체하 는 미래형 종교의 전령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 글의 구성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뤄진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이 글의 논지를 전개해 가기 위한 가설적 입론으로서 상호존재신론 이라는 동양적 신관을 제시하고 규정한다.1) 상호존재신론은 앞에서 언급한 이원론적(dualistic) 신관의 문제와 한계에 대항하고 그것을 대 체하는 일종의 ‘불이론적(non-dualistic)’ 신 관념에 기초하는 개념이다. 불이론적 신관은 이원론적인 신관과 달리 신과 세계, 자연과 초자연 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 혹은 전체의 관점에서 본 동양적 신관이다. 아래에서 논의하고 있듯이, 상호존재신론은 틱낫한의 공과 연기에 해당하는 상호존재(interbeing)를 폴 니터가 하느님(interbeing-God)으로 이해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상호존재신론’(interbeing-theism)으로 제안 한 것이다(김종만·유광석, 2018: 168).

두 번째 부분에서는 상호존재신론의 전환적 기도 개념에 대한 심 도 있는 논의를 전개한다. 모든 종교에서 신관은 해당 종교인들의 신앙적 정체성과 실천적 삶에 토대가 된다. 따라서 신관에 대한 인 식의 전환은 불가분하게 기도의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이어진다. 논 의의 전개는 청원기도의 본질과 지향성에 대한 분석을 통해,2) 이원 론적 신관에 따르는 전통적 기도를 불이론적 신관의 기도와 대비하 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러한 기도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의 문제는 불가분하게 이 글 의 세 번째 논의인 영성적 전환의 주제와 연결된다. 논의의 전개는 이 영성적 전환의 현상이 기도의 전환 주제와 더불어 탈근대 사회 의 실존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이해에서 시작해, 전환된 영성에 대한 개념 규정과 그 전환된 영성 개념이 함의하는 문제들을 검토 해 본다.

결국 이 글은 21세기의 지구적 실존 상황에서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종교의 대체나 변용 또는 종언의 가능성 테제에 대한 적극적 반영의 소산이다. 기도와 영성의 전환적 또는 대안적 변용의 가능성 을 살펴봄으로써 새로운 종교이해의 전망을 시론적 수준에서 탐구 한 것이다.

상호존재신론의 정의

II.

서양 그리스도교의 신관은 존재론적 사고와 실체론 철학에 근거 한다. 존재론적 사고는 우주의 존재 근거를 궁극적이고 필연적인 신 으로 보는 고전적 철학적 신론(classical philosophical theism)에 기초한 것으로 “만물이 공간 속에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존속하는 물질조각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 물질조각들은 연속적인 시간의 계 기들이 개체의 독립 상태를 띄고 있는 존재”이다(김종만·유광석, 2018: 139). 존재론적 사고에서의 신관은 무한하고 절대적이고 영원 한 특성을 지닌 채 자기변화를 겪지 않는 신의 완전성에 근거한다.

이러한 신 이해는 그리스 철학, 구체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신 이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신은 완벽하고 무한하며, 불변하고 자기 변화가 없는 창조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을 신학화 하면서 신은 완벽하고 무한하며, 변화를 겪지 않는 존재 라는 신의 단순성(simplicity)을 파생시켰다. 이와 같은 존재론적 사고 는 “사물의 근본 양태가 더는 쪼개지지 않는 원자라고 본 데모크리 스토스(Democritos)에서부터 실체의 본성을 자기완결이라고 생각한 데카르트(Descartes) 및 이후 철학자들에게 이르기까지 사물의 개체적 독립성과 독존성에 근거”하여 철학에서는 “모든 실체는 일정한 공간 과 시간 속에서 스스로 존재하고 자기 존재를 위해 다른 존재를 필 요치 않는다는 ‘실체’ 개념”으로 이해하는 실체론 철학으로써 그리 스도교 신학의 원형이 되었다.

이것은 신과 세계의 관계를 철저히 분리하면서 신은 세계와 무관 한 채 완벽하게 자존적이기 때문에 신의 초월성은 필연적이고 내재 성은 우연적인 신의 존재방식을 지닌다. 그 결과 신의 초월성을 정 당화하기 위해 자연과 초자연을 나누는 초자연적 유신론(supernatural theism)이 탄생했다(김종만·유광석, 2018: 139-141).3) 초자연적 유신론 은 세계와 무관한 ‘저 바깥에’ 계신 초자연적 존재인 하느님이 세계 를 창조하고 간섭하는 분으로 개념화된다(마크스 보그, 2001: 34).

초자연적 유신론에서는 신을 인간의 세계와 무관하게 ‘저 바깥’, 자연 적 흐름 ‘너머’에 있는 존재, 곧 초자연적 존재로 간주한다. ‘여기’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니, 이 신은 알려지거나 경험되기 보다는, 믿어져 야 한다고 요청된다. (…) 신을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인간 비슷하게 인격적으로 상상하면서 그 신이 저 ‘밖’, 보이는 곳 저 ‘너머’에 있다고 믿는다. ‘밖’에 있는 신을 향해 기도하고 찬양하며 예배를 드린다. 신의 초월성을 공간적으로 이해하다보니, 신이 높은 하늘에 있다고 상상한다.

(이찬수, 2014: 7-8)

이러한 신관에서는 신이 우주의 창조자이면서도 우주의 한 구석 을 차지하고 있는 유한자로 격하시키고 “구름 너머 어딘가에서 특 정 인간에게 전파 같은 계시를 내려 보내는 신령 같은 존재로 축 소”해 버린다. 신을 이렇게 왜곡되게 보는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성서를 불변의 진리이자 척도로 간주하여 성서를 역사적 산물 로 보지 않는, 곧 성서에 등장하는 신에 대한 묘사들이 그 성서를 낳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신에 대한 부분적 이해라는 사실을 인식하 지 못하고 ‘문자화된 신’과 ‘문자 너머의 신’을 구분할 줄 모르는 제 한된 안목 때문이다(이찬수, 2014: 15-16).

실체론(substantialism)에 기반을 둔 서양 신학의 전통적인 초월적 신관은 신을 저 너머 어딘가에 설정하고 신과 세계의 관계를 철저 히 분리함으로써 서로를 공유하지 못하고 세상과 분리된 초월적 신 이 세상 밖에서 세상의 활동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세상에 일방 적으로 영향을 행사하는 완벽하고 불변적인 존재(being)이며 “(사)물 화”(reification)된 신이다.

하지만 상호존재신론은 초월적 유신론의 신은 세계와의 적극적 상호관계성을 결여한 것으로 보고, 초월적 유신론이 전제하고 있는 ‘존재’(being) 개념의 대안으로 ‘상호존재’(interbeing) 개념에 기초한 새 로운 신관을 논구한다. 이 점에서 상호존재신론은 동양적인 대안적 신관이라고 할 수 있다(김종만·유광석, 2018: 16; 이찬수, 2014: 7-8).

“상호존재신론”(interbeing-theism)에서 ‘상호존재’(interbeing)는 베트남 출신 승려이자 불교학자인 틱낫한의 연기적 관점에 근거한다. 연기 (緣起,pratitya-samutpada, dependent co-arising)는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 래에서 깨달은 불교의 핵심 사상으로 문자적으로 보면 무엇을 연하 여(pratitya) 함께(sam) 일어난다(utpada)는 뜻이다. 모든 사물이 어떤 조건과 원인에 의하여 결과가 생겨나고 그 결과는 다시 다른 것의 원인이 되어 다른 결과를 낳고 어느 것도 홀로 생성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상호존재는 만물이 상의상존(相依相存)하여 함께 존재하는 불이론적(不二論的) 연기법을 틱낫한이 현대적 용어로 새롭게 조어 한 것이다. 틱낫한이 ‘상호존재’(interbeing)를 조어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존재하다’라는 영어 동사, ‘to be’가 존재론을 설명하는데 부적절하고 완벽하지 않다. ‘존재하다’가 온전하게 되려면 접두사 ‘inter’(…사이의, 상호간의)와 동사 ‘to be’가 결합되어 새로운 동사인 ‘inter-be’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존재하다(to be)’의 새로운 동사 ‘inter-be’에 ‘-ing’를 결합하 여 ‘상호존재’(interbeing)’라는 새로운 신조어를 만들었다.‘존재’인 ‘being’은 ‘아(我)’가 스스로 존재하는 자존적 실체를 전제한다고 해서 그 단어를 거부하고, ‘상호존재’(interbeing)를 선호한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무실체 성을 나타내므로 일체 사물과 현상의 연기론적 의타성(paratantra)을 대 변하기 때문이다. ‘상호존재’(interbeing)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연관 되어 있고 상호 침투하면서 다른 것들과 공생(共生)을 바탕으로 한다는 뜻이다.

(김종만·유광석, 2018: 144)4)

상호존재는 존재하는 모든 개체가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 고 상호 연결된 관계적 그물을 이루면서 언제나 끊어지지 않고 유전, 생성한다는 뜻을 갖는다. 이점에서 상호존재의 동양적 표현은 ‘공(空)’이 다. 공은 무(無)를 의미하는 존재론적 개념이 아니라 모든 것이 상호 연 결되어 끊임없이 운동 변화한다는 관계론적 개념이다(김종만·유광석, 2018: 148-151).5) 그러므로 상호존재는 연기적 인과의 망으로서의 공이 라 할 수 있다. 불교의 연기와 공에 해당하는 틱낫한의 상호존재를 종 교해방신학자 폴 니터는 하느님으로 이해한다. 그는 서양의 초월적 유 신론에서 주장하는 초월적인, 전능한, 완벽한 하느님+ 인격체= 초월적 이고 전능하며 완벽한 존재인 ‘초월적 인격체’로서의 하느님을 거부한다.

(폴 니터, 2011: 80)

하느님이 나의 반대편 혹은 바깥에 있는 하나의 ‘인격체’가 된다면 내 안의 하느님, 생기를 불어넣은 에너지로서 체험되는 하느님의 특성 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하느님이 ‘나-당신’ 관계의 일부가 될 때, 이 당신으로서의 하느님은 내가 하느님에게 느끼거나 느끼기를 바라는 친 밀함에 맞지 않는 어느 정도의 타자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당신으로서 의 하느님이 타자로서의 하느님이라는 이원론으로 너무 쉽게 빠져든다.

(폴 니터, 2011: 80)

니터는 하느님을 ‘나 - 당신’의 관계로 설정된 신적인 ‘인격체’로 보는 실체론에 반기를 들고 하느님은 ‘인격체’가 아니라 “인격적 특 성을 지닌 실재 혹은 에너지로, 모든 것에 스며들어 있는 영”으로 이해한다(폴 니터, 2011: 88). 니터는 하느님을 나-너의 ‘인격체 대 (對) 인격체’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대상화되고 타자화된 하나의 초월 적 인격체로서 특정 공간에 제한되어 있는 사물과 같은 어떤 존재 로 보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하느님을 만물에 편재한 영으로 인식 한다. 니터의 이러한 신 인식은 불교의 공관에 대한 개념에서 비롯 된다. 그는 공인 상호존재를 에너지 장으로 표현한다.

공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이미지는 에너지 장이다. 모든 존재는 이 장 안에서, 그리고 이 장에 의해 상호작용할 수 있고 상호 생성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다. 에너지 장은 그 안의 모든 활동과 함께, 그 안 의 모든 활동을 통해 ‘존재’한다. 그런 활동이 없다면 에너지 장은 존재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 에너지 장은 그런 활동들로 환원되거나 귀결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상호존재는 부분들의 합이지만 모든 부분 들을 더한 것보다 더 큰 것이다.

(폴 니터, 2011: 56)

니터는 불교의 공관 의미를 반영하는 틱낫한의 상호존재 개념이 자신의 신관인 하느님과 완전히 부합하며, 따라서 하느님은 “위에, 꿰뚫어, 안에”(엡 6:4) 있는 에너지 장의 상징과 상통한다고 본다. 니 터는 틱낫한의 상호존재에 어울리는 하느님의 상응어(相應語)는 영 (Spirit), 구체적으로는 하느님을 “연관시키는 영”이라고 표현한다. 아 래의 인용문은 이를 잘 나타낸다.

공으로 건너갔다가 영으로 돌아온 후 나는 영이 더 의미 있게 가리 키는 것은 특정한 ‘존재’가 아니라 편재하는 ‘에너지’라는 것, 영은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으면서 많은 것들에게 활력을 준다는 것, 영은 내재 하기 보다는 상호 침투하는 방식으로 그것이 활력을 주는 것과 하나 된다는 것을 … 영은 실로 창조의 도구 또는 힘이다. 영은 태초부터 우 리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생명, 모든 존재에게 근거를 만들어 주고 서 로를 연관시켜 준다. (…) 완전히 신비롭고, 모두지 예측할 수 없으며, 사랑과 자비로 충만하고, 그 사랑과 자비에 지배되는 영은 내가 그 안 에서 쉴 수 있는 자궁이다. 나는 매 순간마다 영으로부터 태어난다.

(폴니터, 2011: 68-9)

니터가 하느님을 상호존재의 역동적 에너지 장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곧 연관시키는 영(Spirit)6)이기 때문이다. 영은 모든 생명 현상 의 근거이고, 어디에나 작용하는 힘이며,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실재 의 비물질적인 층, 수준, 혹은 차원이다. 곧 신은 있지 않은 곳이 없는 무소부재(無所不在)이다.

(이찬수, 2014: 11-2; 마커스 보그, 2001: 35)7)

같은 맥락에서 길희성 또한 신을 인격적 뜻이나 의지를 가진 행위의 주체(agent)나 어떤 실체적 존재로 보지 않고 세계와 인간에 작용하는 거대한 힘, 무한한 에너지 혹은 생명의 영으로서 동양의 기 개념에 더 가까운 실재로 여긴다.

(길희성, 2005: 122)

이 에너지 혹은 생명의 영은 신의 속성이나 소유가 아니라 신 자체 이다. 신은 영을 소유한 주체나 실체라기보다는 영 그 자체가 신이라는 말이다. 물질계와 생명계와 정신계는 이 무한한 에너지의 다층적 변현 (transformative manifestation)으로서, 신은 모든 유한한 사물과 생명체들의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다. (…) 다시 말해서 신은 만물의 기(氣)뿐 아니 라, 이(理)이기도 하다. 신은 이가 내재된 기 혹은 이를 내포하고 있는 기라고 할 수 있다.

(길희성, 2005: 122-3)8)

니터는 이러한 신 이해를 하느님의 성령이 모두에게 있고 영은 나와 함께 있고 내 안에 있고, 나로서 살고 있는 편재하는 에너지로 서의 상호 침투하는 영으로 서술한다(폴 니터, 2011: 69). 니터의 신 관인 내 안에 나와 함께 나로서 살고 있는 에너지 장으로서의 하느 님은 다른 두 존재로 분열되지 않고 거리와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이사무애(理事無碍) 혹은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불이적 신관이다. 이 것은 “정신과 물질, 몸과 영혼, 인간과 자연의 구별은 있어도 이원 적 대립은 있을 수 없으며, 사물들 간의 차이와 다양성은 있어도 단 절”은 존재하지 않는다(길희성, 2005: 123-4).9) 길 희성은 이러한 중 국 화엄철학의 사사무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물이 상호 의존적이기에 그 자체의 존재를 갖고 있지 않다는 말 은, 달리 표현하면 사물 사이의 차이와 거리가 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 는다는 말입니다. (…) 사물과 사물 사이에 아무런 막힘이나 장애가 없 다는 뜻이지요. ‘A’라는 사물 안에는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B, C, D 등 다른 수많은 요소가 들어 있으며, B 또한 그러하므로 결국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를 물고 있고 그들 사이에 단절과 막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일곧다 다곧일(一卽多多卽一)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의 사물 속 에 온 우주가 들어 있고 온 우주에 하나의 사물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 다. 그러니 존재하는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지요.

(길희성, 2004: 158)

틱낫한도 ‘comprehend’의 라틴어 어근 ‘com’과 ‘prehendre’가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과 움켜쥐거나 주워 올린다는 뜻이라며 사물의 차별 과 분리를 거부하고 사사무애와 같이 ‘하나가 되는 것’을 제시한다. 곧 상호존재는 차이나 거리, 장애와 막힘이 없는 ‘그것이 되는 것’이 다. 따라서 틱낫한이 제시한 공과 연기의 조어인 상호존재를 니터가 하느님으로 이해한다는 점에 동의하게 되면 니터의 신관을 상호존 재-하느님(interbeing-God)으로 볼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새로운 동양 적 신관인 상호존재신론(interbeing-theism) 개념이 전환적으로 제시될 수 있다(김종만·유광석, 2018: 167-8).

상호존재신론의 기도

III.

상호존재신론이 초월적 신관에 대한 전환적 신관이라는 점에서 당연히 그 신관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신앙 실천의 한 영역인 기 도에도 그 전환이 반영되어지게 된다. 아래에서 그리스도교의 청원 기도 형태에 초점을 맞추어, 전통 그리스도교의 이원론적 신관에 기 초한 기도와 불이론적 신관에 기초한 기도의 본질과 지향성에서의 차이가 무엇이며, 왜 불이론적 기도로 전환되어야 하는지를 조망해 본다.

기도에 대한 문제제기

1.

우리가 어떤 종교를 믿건 그 신의 이름이 무엇이건 간에 힘든 일이 닥치면 누구나 그것을 뛰어넘고자 하는 바람을 품게 된다. 자신의 몸이 아플 때나 사랑하는 이가 고통 속에 있을 때,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어 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를 향해 그것을 해 결해 달라는 염원을 품게 된다. 이것을 우리는 ‘기도’라고 부른다.

(틱낫한, 2006: 157)

위 인용문은 틱낫한이 서술한 기도에 대한 일반적 정의이다. 기 도는 한자어 ‘빌’ 기(祈)와 ‘빌’ 도(禱)의 합성어로서, 그 사전적 정의 는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어떠한 신이나 절대적 존 재에게 사정을 아뢰고 무엇을 이루어주도록 비는 것 또는 그런 의 식을 뜻한다. 영어의 ‘기도하다’라의 의미의 ‘pray’는 “한 사람이 다른사람에게 부탁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이영미, 2015: 42; 웨인 스피어, 1990: 17).10) 인간은 누구나 어려운 상황에 닥치게 되면 종교의 유무를 떠나 의지할 대상을 찾고 그 대상을 통해 자신의 바람이 성 취되기를 원한다. 공식적인 예배 장소의 공동기도이든, 개인이 수행 하는 개인기도이든, 말로 하는 형태의 기도-큰 소리로 들리게 하는 기도, 조용히 하는 기도-이든, 말없이 하는 형태의 기도- 명상 (mediation)와 묵상(contemplation)-이든 기도의 주종은 하느님께 무언가 를 요청하는 “청원”기도11)로 수렴된다(마커스 보그, 2001: 192-3). 아 래는 청원기도의 전형적 예이다.

식사 전에 우리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 예수여, 오셔서 우리의 손님 이 되어 주시고, 이 선물들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게 하소서.” 특별한 식사자리에서도 청원의 성격을 띤 기도를 드리곤 했다. “우리의 식탁에 함께 하소서, 주님; 여기와 모든 곳에서 높임을 받으소서; 은총으로 축 복하셔서, 당신과 함께 낙원에서 잔치에 참여하게 하소서.” 침대에서 하느님께 보호를 간청했다. “이제 누워 잠들고자 하오니, 주님 나의 영 혼을 지켜주소서; 만약 제가 깨어나기 전에 죽게 되거든, 주님 나의 영 혼을 데려가 주소서.” 나는 하느님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내가 알 지 못하는 사람들(모든 아픈 사람들)까지도 축복해 달라고 요청했다.

(마커스 보그, 2001: 192-3)

보그에 따르면 하느님께 나와 타인을 도와 달라는 요청이나, 어 떤 것들을 달라는 요청이나, 용서를 구하는 등의 모든 기도의 배후 에는 ‘저 바깥에’ 계신 초자연적이고 간섭적인 모델에서의 하느님 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하느님은 어떤 기도는 응답하고 어떤 기도는 응답하지 않을 결정권을 가진 “우주적인 호텔보이(a cosmic bellhop)”로서의 이미지를 가진 하느님이다(마커스 보그, 2001: 192-3). 연약한 인간이 하느님께 무언가를 요청하는 것은 인간이 지닌 한계 이자 본능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인간에게 신이 왜 필요하고 어떤 유형의 인간이 신을 필요로 하는 지에 대해 자문(自問)한다. 그는 인간이 신을 찾게 되는 순간은 신체 와 정신이 극도로 빈곤해져 이성적 판단이 흐려졌을 때 신과 같은 막강한 안전지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강력한 힘을 소유 하지 못하고 삶에서 고통과 고뇌만 보는 인간은 자신이 궁핍해 졌 을 때 신앙의 대상으로서 신을 찾고, 자신이 나약해졌을 때 강한 신 을 찾는데, 니체는 이러한 사람들을 ‘낭만적 염세주의자’라고 칭한다 (김웅래, 2015: 203).

기도에 대한 이와 같은 정의와 설명들의 공통점은 기도하는 자와 기도 받는 자를 분리한다는 것이다. 곧, 기도하는 자는 현상계에, 기 도 받는 자는 초월계에 두며 둘을 분리하고 기도 받는 자를 대상화, 타자화 시킨다.12) 이것은 서양 그리스도교에 기초한 전통적인 기도 의 본질과 지향성에 대한 설명으로서, 보그는 이런 형태의 기도는 “저기 어느 곳에 계실지도 모르고 안 계실지도 모르는 분, 그래서 대답을 해줄지도 모르고 안 해줄지도 모를 멀리 계신 어떤 분에게 말을 거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보그는 “오히려 하느님을 ‘바 로 여기’ ‘우리 주변 어느 곳에나’ 계신 분, 알든 모르든 우리는 이 미 그분과의 관계 속에 있는 그러한 분으로서 보는 틀 속에서의 기 도”를 하는 것이 옳다고 주창한다(마크스 보그, 2001: 193-4).

니터도 중년에 접어들면서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 행하는 대화로서의 기도에 어려움을 느꼈다. 그는 교회 공동체가 드리는 전 례기도나 개인기도에서 대화로서의 기도를 할 때면 강요받는 것 같 아서 부적절함을 느끼고 말을 더듬게 되거나 따분함을 느꼈다. 그 이유는 하느님과의 대화의 기도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청원기도에 있다. 청원기도는 인간이 하느님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받는 것을 전 제하는 것으로, 하느님이 삶에 개입하고 간섭하여 변화를 일으켜 주 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니터는 특정한 누군가를 돕기 위한 하느님의 개입은 불가피하게 또 다른 누군가에게 차별을 가져오게 된다는 모 순의 문제를 지적한다(폴 니터, 2011: 258).

우리가 일요일에 소풍 가기 좋은 날씨는 농부의 바짝 마른 논밭에는 나쁜 날씨다. 만약 하느님이 내 여동생의 암을 낫게 해 준다면, 어째서 같은 병으로 고통 받는 남의 여동생은 낫게 해 주지 않는가? 더구나 그들도 내가 여동생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는 만큼 그들의 여동생을 위해 열심히 기도한다면 말이다.

(폴 니터, 2011: 259)

같은 이유로 길희성도 청원기도의 문제점을 아래에서와 같이 강 하게 비판한다.

많은 신자들이 자기가 바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무조건 자기 뜻을 앞세우고 하느님께 매달린다. 어떤 사람은 한 특정 기도 제목을 놓고 하느님과 사생결단을 하듯 덤벼들며, 또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설득하거나 협박하듯이 기도한다. (…) 하느님은 과연 어떤 한 개인이나 집단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시는 존재일까? 그렇다 면 왜 어떤 사람의 기도는 응답하고 어떤 사람의 간절한 기도는 외면 하는 것일까? (…) 불치의 병을 앓는 사람치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 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 어째서 기도로 암을 치료 받았다는 사람 보다는 암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을까? (…) 기도를 하면 들어주고 하 지 않으면 들어주지 않는 하느님, 어떤 이의 기도는 들어주고 어떤 이 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는 하느님 (…) 그런 하느님은 더 이상 내가 생 각하는 하느님은 아니다.

(길희성, 2005: 119-121)

니터는 차별의 문제 외에도 우리가 하느님에게 원하는 것을 받으 려면 그를 경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는 주고받기 식의 기도의 형태를 비판한다. 그는 하느님이 우리와 다르고 우리보다 위대하고 우리를 초월한다는 것을 계속 상기시키기 위해 경배를 필요로 하는 분이라면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거리와 간격이 생긴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기도 방식에 대한 니터의 첫 번째 문제의식은 그리스도교의 기도가 지나치게 하느님을 숭배한 나머지 이원론에 빠져 있다는 것 이다(폴 니터, 2011: 260-1). 니터의 지적처럼 이원론에 기초한 주고 받기식의 기도에는 종교 현상의 본질 개념인 ‘신’까지도 합리성의 관점에서 정의하려는 합리적 선택이론에 기초한 거래 심리가 작동 하고 있다.

애덤 스미스의 종교관은 모든 인간이 기본적으로 자기이익(self-interest) 을 추구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 세속적 행위들과 마찬가 지로 종교적 행위에서도 모든 참여자들이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면 종교적 행위를 경제적 합리성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적절한 것이다. 어떤 종교인들도 맹목적으로 믿지는 않 는다. (…) 수요자들의 입장에서도 평화, 안식, 철학, 예술, 사회적 소속 감 및 물리적 치료에 이르기 까지 종교가 제공하는 다양한 편익이 기 대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종교를 소비하고자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종 교현상은 본질적으로 교환관계(exchange relationship)의 일종이다.

(유광석, 2014: 29).

합리적 선택이론가들이 기도와 같은 종교 현상을 교환관계13)의 일종으로 보는 이유는 그들의 신관이 이원론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 다. 그들은 종교를 이해하는데 있어 의례(rites)와 제의(rituals)보다 신, 초월적 존재, 궁극적 실재와 같은 개념들이 더 중요하다고 보면서 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신은 의식과 욕망을 가진 초월적 존재이다. 초월적 존재이기 때 문에 인간에게 물리적 힘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으로 상상 되며, 존재들(beings)이기 때문에 단순한 자연적 힘(forces)이나 실체 (entities)이기보다 의식과 욕망을 가진 대상들이다. 따라서 신들은 인 간의 의식과 욕망을 위탁받을 수 있는 인격적 관계가 가능한 존재 들이다.

(유광석, 2014: 41)14)

합리적 선택이론가들에게 신은 초자연적 유신론(supernatural theism) 에서의 신으로, 신을 저 너머의 세계의 바깥에 두고 믿어야 되거나 경배를 받을 대상으로 규정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초월적 존재인 신들을 의식과 욕망을 가진 대상들로 취급함으로써 신인동형론이나 신인동감론의 신들로 의인화한다. 따라서 여기서 기도는 초월적 존 재인 절대 타자에게 자신의 소원을 투사하고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교환관계의 매개체가 된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는 의식과 욕망의 포장으로 둔갑된 자신의 소원을 초월적 존재인 절대 타자 하느님을 통해 성취하려는 매개체가 되고 신과 인간의 거래 관계로 변질된다. 기도에 대한 이러한 왜곡된 인식의 근저에는 바깥에 있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으려는, 곧 하느님을 어떤 존재자나 대상적 존재 혹은 객체로 생각하여 유한한 인간이나 사물로 환원하려는 태도에 있다. 무한한 하느님을 대상적 존재로 격하하거나 유한한 인격체 같 은 한 존재자로 제한하는 것은 무한을 유한의 한 요소로 한정하는 우상숭배와도 같다(길희성, 2004: 179).

길 희성은 무한을 유한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우상숭배와 다름없 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무한한 하느님을 유한한 대상이나 사물로 환원하여 기도라는 종교적 제의로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려는 바람 자체가 이미 ‘기도의 우상숭배화’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신과 인간 을 나누는 이원론에 기초한 초자연적 유신론의 신관을 반영하는 기 도는 자신의 바람을 이루는 매개체이거나 신과 인간을 거래관계로 만드는 심각한 문제를 지닌다. 이런 문제를 극복할 대안적 기도관이 다름 아닌 불이론적 신관을 반영하는 상호존재신론의 기도이다.

불이론적 기도

2.

기도에 대한 왜곡된 인식에서 파생되는 ‘기도의 우상숭배화’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기도의 대상에 대한 인식론적 전환이 요청된 다. 그 전환은 바로 상호존재신론이라는 불이론적 신관을 반영하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상호존재신론에서 하느님은 경 배 받고 청원 받는 초월적 타자나 슈퍼맨 같은 존재가 아니다. 하느 님은 우리 안에 내재하고 우리로서 살고 행동하고 존재하는 인격적 에너지로서의 상호 연관시키는 영이며 나를 마주보는 ‘타자’가 아니 라 나의 생명력과 하나인 창조와 유지의 생명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호존재신론에서는 기도하게 되는 하느님이 밖에 있거나 반대편에 서 있으면서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거나 개입하는 ‘타자’가 될 수 없다(폴 니터, 2011: 262). 틱낫한은 “누구에게 기도하는가?”라는 질 문에서 기도의 대상에 대한 성찰적 전환을 환기시킨다.

불교 수행 전통에서는 합장하고 절을 하며 기도할 때마다 우리가 누 군지, 우리 앞에 앉아 있는 기도의 대상이 누군지를 알기 위하여 깊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 부처님을 그대와 아무 관계도 없고 그 대와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로 생각한다면, (…) 그대의 기도와 예배는 허망한 것이 됩니다. 그 기도가, 홀로 떨어진 자아가 따로 있다는 그릇 된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 부처님, 또는 그대가 섬 기는 분은 그대 바깥에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대와 그분은 서로 연 결되어 있습니다.

(틱낫한, 2016: 34-5)

틱낫한은 불교의 한 게송(偈頌)을 소개한다. “절하는 이와 절 받는 이가 본디 함께 비어 있네(틱낫한, 2016: 35-6).” 여기서 비어 있다는 것은 모든 이가 독립된 자아가 아니고 동떨어진 실체를 지니지 않 았다는 뜻의 공(空)이나 상호존재를 가르치는 것으로 우리가 부처와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부처 안에 있고 부처가 우리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상기의 인용문에서 불교와 부처님 이라는 단어를 그리스도교와 하느님으로 바꾸면 상호존재신론에서 의 기도의 대상과 정확히 일치하게 된다. 그러면서 틱낫한은 스스로 위와 같은 기도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교에서도 마찬가지라며 하 느님과 우리는 서로 분리된 두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과 우 리 사이에는 아무런 분별과 차별도 없음을 역설한다. 그러므로 기도 하는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밖의 존재 둘 다를 향해 기도하는 것이다(틱낫한, 2016: 36-7; 2006: 39-42).

니터도 틱낫한과 같은 맥락에서 “내 생명을 사는 것은 내가 아니 고 나로서 사는 그리스도”라는 바울의 고백을 통해 하느님과 우리 의 관계가 불이적(不二的)이며 그리스도-영과 우리가 둘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나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와 같은 하느님에 대 한 새로운 이해를 토대로 기도의 정의에 대한 성찰적 전환이 필요 하다고 역설한다(폴 니터, 2011: 262). 먼저, 상호존재신론에서의 기 도는 하느님의 섭리와 개입에 의해 예정된 대로 이뤄진다고 보는 일종의 결정론적 기도와는 차원적으로 다르다. 전통적 그리스도인들 은 하느님이 정하시고 예정하신 것은 변경될 수 없다는 결정론적 사고에 경도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하느님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해 놓았다면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것은 모두 부 질없는 노력이 아닌가? 만일 한 청년이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 가 될 예정이고, 한 남성은 몇 살에 사업에 실패하고, 한 여성은 몇 살에 암으로 죽을 예정이라면 그것이 하느님의 결정이고 변경 될 수 없는 운명이라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허사가 될 수 있다. 그 어떤 변신론적 수사학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정론적 사고에서의 기 도는 아무런 효과도 없고 오히려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틱낫한, 2006: 24-5; 틱낫한, 2016: 26).

그러나 상호존재신론의 관점에서 기도를 재조명하면 기도하는 사 람도 기도 받는 이도 비어있다. 다른 말로 하면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가 없고 서로가 상호연관성 가운데 있기에 하느님과 내가 분리되 어 있지 않고 서로 포함되어 있다. 곧, 모든 것은 상호연관 되어 있 기에 모든 것은 변한다. “모든 것은 다른 것을 통해서 다른 것과 함 께 생겨나고 계속 존재하게 된다(폴 니터, 2011: 51).” 만물은 함께 생성하는 것이기에 전통 그리스도교의 기도에서처럼 결정되어진 운 명 같은 무언가는 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니터는 하느님의 완전성 이란 가장 잘 변하는 존재에 있다고 말한다(폴 니터, 2011: 51). 이와 같은 상호존재신론의 기도는 불교 명상과 천주교 관상기도의 경험 을 현상학적으로 연구한 논문에서 증명된다. 다음은 불교 명상가의 공 체험을 경험적으로 진술한 내용이다(김혜옥, 2016: 173-4).15)

진짜 ‘공’(空)은 비어있지 않아요. 거기에 다 있어요. 다 있기에 공이 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거에요. 의식이 텅 비어 있을 때 나라는 에고의 경험이 떨어져 나간 거지요. 그래서 공이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것이 나라고 할 것이 없는 거에요. (…) 그 공은 절대 비어있지 않아요. 진짜 공은 그 안에 다 있는 거에요. 마치 우주 공간에 그 많은 것들이 있는 것처럼 ‘공’ 안에 다 있어요. (…) 그건 무한한 에너지, 모든 것이다. 전 부! 묘사하기 힘들어요. 언어로 그냥 ‘다(모두)’라고 표현을 해요. (…) 또 거기에는 나-너가 없어요. 그 ‘다(모두)’가 하나로 있어요. 무와 유가 같 이 있다고 그것이 공이라고 (…).

다음은 관상기도를 통해 탈혼을 체험한 천주교 신자의 얘기다(김혜옥, 2016).

아무것도 없는 속에서 모든 것이 멈춰버렸지만 인간적인 나됨이 인 간적 나됨이 아닌 경험이었어요. (…) 초월적인 경지에 어느 순간 머물 렀던 거에요. (…) 천년도 한 순간이라는 그런 것이 있을 것 같은 그런 경험이었지요. (…) 내 영혼이 영원과 맞닿아 있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건 표현하기 참 애매해요. (…) 굉장히 풍요롭고 꽉 차있었고 모든 것 이 다 있는 느낌이었어요. 내가 아무것도 없는 느낌이요. 나의 존재로 있었던 것 안에는 무한한 것이 있다라는 것, 꽉 찬 것 같았어요.

위의 공 체험과 탈혼 체험의 경험자들에서 나타나듯이 “그 안에 다 있고 무한한 에너지이고 모든 것이 전부이며, 나-너가 없다, 내 영혼이 영원과 맞닿아 있고, 풍요롭고 꽉 차 있었다, 모든 것이 다 있는 느낌, 내가 아무것도 없는 느낌”이라는 진술은 상호존재신론의 기도에서 말하는 독립적인 항상성의 자아라는 나의 실체는 없고 모 든 것이 상호 연관성 가운데 생성 변화하면서 하느님과 내가 이원 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서로 포함되어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인간과 다른 하느님의 전지전능성이 설 자리 가 없다. 하느님은 외부에서 물질계, 생명계, 인간계에 개입하거나 작용하는 ‘초자연적’(supernatural) 존재가 아니라 만물을 생성하고 만 물과 더불어 움직이는 만물의 내재적 힘, 다른 말로 우주의 궁극적 실재로서의 생명의 영(Spirit)으로 이해된다(길희성, 2005: 125).16)

요컨대, 상호존재신론의 불이론적 기도는 전능하고 완전한 초월 적 타자로서의 하느님의 존재 그리고 이와는 차별적으로 분리되는 기도자(자아)를 전제하는 이원론적 신관에 기초한 전통 그리스도교 기도와는 차원적으로 다르다. 불이론적 기도는 모든 것을 함께 생성 하는 에너지 장으로서 움직이고 생성하는 상호성의 신비에 기초한 동양적 대안 신관의 기도이다.

전환적 기도: 본질, 방법 및 지향성

3.

불이론적인 신관에 기초한 상호존재신론의 기도는 동양적 영성 전통을 반영하는 대안적 기도이다. 무엇보다도 상호존재신론의 기도 는 니터가 말하는 담화적(discursive) 기도의 형식, 곧 (비)언어적 말과 형상을 통해 하느님과 관계하려는 기도 형태를 넘어선다(폴 니터, 2011: 267-9).17) 상호존재신론의 기도는 저 너머의 실체를 시각화하 여 예수에게 이야기하거나 기도하는 대신 말과 생각을 넘어 내가 응시하고 있는 예수가 다름 아닌 내 안의 실재임을 자각하는 것이 다. 이것을 틱낫한의 이해로 바꿔 말하면 “나는 신에게 기도한다. 나는 신에게 기도하며 내 안의 신과 만난다.”는 의미이다(틱낫한, 2006: 77). 곧, 상호존재신론의 기도는 외적으로 시각화된 영상이 나 와 그리스도의 불이적 합일의 내적 실재가 되게 하는 것, 다시 말 해, 상호존재의 항상 변화하고 역동적이며 창조적으로 상호 연관되 어 있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폴 니터, 2011: 296, 298-9).

달리말해, 상호존재신론의 기도는 자아적 주체의 시각으로 타자 를 대상화하여 기도하는 이와 기도 받는 이, 그리고 만물과 나를 분 리함으로써 외재화된 힘을 통해 객체(사물/사건)를 바꾸려 하거나 주체적 자아가 타자화된 신적 실체와 합일을 이루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막 11:17a)이라는 표 현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은 특정한 시간이나 일정한 공간에만 나타나는 초월적 타자의 신이 아니라 시공간을 넘어선 상호존재의 영으로 어디든 존재하지 않는 데가 없기 때문이다.

상호존재신론에서는 애당초 자아의 고정된 항상성이 존재하지 않 으므로 타자를 대상화하거나 타자와 합일을 이루려는 것이 불필요 하다. 오히려 상호존재신론의 기도는 내가 남과 분리되어 있다는 마 음의 독소를 제거하고 자아를 떠나고 자아를 비움으로써 타자와 연 관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틱낫한은 이것을 통찰과 초월적인 지혜의 뜻인 프라즈나(般若)라며 만물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통찰 에서 기도를 할 때, 그 기도는 자비와 연민이 실리게 되고 자기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다른 존재들에게도 진정으로 필요한 기도를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틱낫한, 2006: 59).

같은 맥락에서 니터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개 입을 요청하는 곧, 저편에서 영이 개입해 오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 라 연관시키는 영이 나타날 수 있게 하는 것이며 이미 있는 영이 활동하게 하는 것이라면서 청원하는 것은 연결하는 것임을 환기시 킨다(폴 니터, 2011, 309). 이에 대해 틱낫한은 지혜로운 기도의 본질 과 지향성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많은 이들이 자신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신이 이것저것을 해주기를 바란다. 그들은 기도를 하며 ‘하나님이 이것 하나만 이뤄주면 정말 행복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날 때 그 자체만의 의미를 지니고 독립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은 없다. 하나의 사건은 수많은 부분들 로 이뤄져 있으며, 또한 그와 반대되는 요소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 …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기도의 목록 으로 만든다. 서로가 서로를 보완한다는 것을 이해 할 수 있는가? 진정 한 기도는 이러한 상대성을 넘어선, 더 높은 곳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기도는 이기심을 담은 어리석음이나 탐욕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이 하는 기도가 전체를 담고 있는지 아니면 부분만을 담고 있는지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틱낫한, 2006: 82)

이렇게 상호성의 신비를 지향하는 기도는 본질적으로 인간사에 초월적으로 개입하는 신과의 합일을 지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 은 개별사물이나 사건 혹은 개별 인간사에 초자연적으로 개입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와 자연 전체, 그리고 인류 역사 전체를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내재적 힘이며, 자연의 법칙운동과 인간의 자유 로운 행위 전체를 관통하여 작용하는 힘이기 때문”이다(길희성, 2005: 125). 그러므로 상호존재신론의 기도는 어떤 특정한 개체나 부 분만을 위한 목적이나 뜻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품은 기도이어야 한다. 이처럼 상호존재신론의 기도는 상대성을 넘고 더 높은 곳을 지향하며 부분이 아닌 전체를 담고 있는 자애심의 기도 로 이어진다. 인도 팔리어의 메타(metta)로 번역되는 자애심 (loving-kindness)은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사랑을 가리키는 것으로 우 리 자신, 사랑하는 사람, 낯선 사람, 원수나 적 등, 모든 이를 사랑 과 호의의 따뜻한 마음으로 포용하며 나아가 자애심이 전 우주로 흘러들어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 모든 산과 계곡, 모든 식물과 행 성들에까지 미치게 하는 것이다(폴 니터, 2011: 282-3).18) 곧 자애심 의 기도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사랑의 기도를, 원수나 적들에 게는 증오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적 요소를 품는 기 도이다. 그래서 틱낫한은 “미움과 원망의 마음으로 기도하지 마세 요. 슬픔과 분노를 품고 신을 부르지 마세요. 우리를 구하는 것은 사랑과 자비의 에너지입니다.”라고 말한다(틱낫한, 2006: 133).

하지만 상호존재신론의 기도는 보편적 사랑의 행위인 자애심을 넘어 특별한 고통을 겪고 있는 자에게까지 이어진다.19) 여기서는 그 들의 행복을 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따 뜻한 힘과 확신으로 고통을 제거하려 한다. 곧 우리 모두를 품고 있 는 상호존재의 자각 가운데 타인과 연결된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받아들이면서 품에 안고 고통을 제거하고자 하는 바램과 행복을 기 원함으로써 우리의 고통까지도 다룰 수 있게 하는 것이다(폴 니터, 2011: 284-5). 말 그대로 아파하는 사람과 함께 아파한다(com-passion) 는 뜻의 자비함(compassion)이다. 같은 맥락에서 헤셀은 기도를 하느 님의 삶으로 들어가는 극단적인 헌신이고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인 간에 대한 하나님의 연민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기도는 인간들이 서로서로를 타자화시켜 이방인이 되는 것 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이방인의 고통에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그는 ‘기도란 곧, 타자되기 (To pray is. in a sense, to become the other)라고 정의한다(Heschel, 1996: 231-2; Fasching, Dechant and Lantigua, 2011: 226-7 재인용). 헤셀 의 “기도 = 타자되기”라는 정의는 상호존재의 의미인 ‘그것이 되는 것’과 맥락적으로 동일한 것이므로 상호존재신론의 기도는 ‘고통 받 는 자와 진심으로 하나 되는 것’이다.

요컨대, 상호존재신론의 기도는 이원론적 기도에서 나타나는 의 인주의적(anthropomorphic) 속성을 갖는 신처럼 인간이나 사건에 관심 을 가지고 개인이나 집단의 생사화복에 개입하고 주관하는 편협한 신을 가정해, 그 외재하는 신적인 힘을 빌려 현재의 바람을 성취하 려는 투사된 욕망 표출도 아니고 신과 인간의 거래에 관한 것도 아 니다. 이러한 기도의 본질과 지향성은 우리 모두를 품고 있는 상호 존재를 통해 보편적 사랑행위인 자애심을 품고 고통 받는 자의 아 픔과 함께 하며 끊임없이 타자와 연결된 채, 생명의 생성을 이루려 는 궁극의 공감 능력을 반영한다(길희성, 2005: 125).

달리말해, 상대성을 넘은 자애심을 확장하여 타자되기를 지향하 는 기도인 상호존재신론의 기도는 “비우고 연관시키는 에너지이고 그 에너지로부터 새로운 연관성과 새로운 생명이 생성”하게 되는 ‘사랑하기’이다. 여기서 사랑은 단순히 인간의 감정이나 도덕적 성품 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근본적 존재 원리로서 어떤 개체이든 자기 폐쇄적으로 홀로 존재할 수 없고 항상 타자와의 관계성과 개방성에 의해서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상호존재신론의 기도인 ‘사랑하기’는 자기 부정과 자기소외를 통해 ‘타자되기’가 되어 생명 의 생성을 이루는 자애심의 마음으로 이어진다. 결국 이러한 기도는 하느님을 변화시키기보다 나를 변화시키고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 기보다 나의 마음을 바꾸고 나의 삶의 태도를 무욕에 이르게 함으 로써 기도자(자아)의 영성적 자유를 이루게 한다(폴 니터 2011, 65; 길희성, 2005:120; 2004:158; 2015:304-5).

상호존재신론과 ‘영성적 전환’

IV.

상호존재신론의 기도는 그 본질과 방법 및 지향성의 측면에서 전통 그리스도교 기도에 대한 전환적 또는 대안적 형태의 기도다. 앞에서 살펴 본대로, 이 기도는 이른바 명상이나 관상기도와 같이 불교의 선이나 힌두교의 요가 또는 이슬람교의 수피즘과 같은 동양 종교의 영성 전통과 상통하는 바가 크다. 사실 이러한 동양적 영성 전통은 그리스도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사막 교부들의 영성, 동방 정교회 영성, 중세 수도원 신비신학의 비판적 수용을 통한 가 톨릭 영성 신학 등이 그것이다(송재룡, 2010: 150), 하지만 앞에서 살 펴 본대로, 이와 같은 영성적 기도의 흐름은 결코 그리스도교의 정 통 또는 지배적 기도 양식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물론 영성은 본질적으로 종교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단위이다.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교, 힌두교 또는 불교와 같은 전통 종교의 신앙 행위에서 영성은 믿음 행위 – 기도, 경건, 묵상, 신비 체험, 방언 – 등을 통해 신적 존재와 긴밀하고 심오하게 소통하게 해주는 정신 육체의 고양된 속성적 자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적어도 20 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영성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나 언설은 일부 소수의 전문 종교인들에게만 전유되었을 뿐, 일반 무신론적 대중에 게는 물론이고 신앙인 일반에게도 특별한 관심과 주목의 대상으로 여겨지질 못했다.

하지만 20세기 중후반을 거치면서 영성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증 대하기 시작했다. 특히 서양의 경우 이 추세는 70,80년대를 통해 확 산된 동양의 명상, 요가, 대체의학 등에 대한 대중들의 관과 맞물리 며 더욱 더 확산되었다(Carrette & King. 2005).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영성적 관심의 증대는 이른바 탈근대적 실존 환경과 맞물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이와 같은 범세계적 수준에서의 영성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는 다양한 담론들이 형성되고 있는 추세 적 변화를 이른바 ‘영성적 전환’이라는 부른다(Houtman & Aupers, 2007, 송재룡, 2013: 260).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영성적 전환’을 촉발하는 주요 배경으로 탈근대 사회의 실존적 특성 중의 하나인 ‘주관적 전환’ 현상이 중요 하게 주목된다(Heelas & Woodhead, 2005; 송재룡, 2013: 262-267; 전명수, 2015: 13-16).20) 무엇보다도 이 ‘주관적 전환’의 상황을 반영하는 극적인 변화는 ‘객관적 진리’ 추구보다는 ‘주관적 체험’을 강조하는 문화적 성향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전통 종교의 신학적 기초이자 전제인 ‘외적(초월적) 권위’로부터 개인의 정신 내면의 탐 구를 통해 찾아지는 ‘내적 권위’로의 전환, 또는 ‘신(하느님)’에서 ‘신 적 자아(self-as-god)’로의 전환이 나타난다(Davie, Heelas & Woodhead, 2003: 1-14).

이와 같은 전환적 신관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니터와 틱낫한의 불이론적 신관을 그대로 반영한다. 니터에게 하느님은 ‘초월적 타자’ 나 ‘슈퍼 맨’과 같은 타자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의 모 든 차원과 상호 연관된 창조와 유지의 영(생명력, 에너지)이다(폴 니터, 2011: 여러 곳). 승려이나 불교 학자인 틱낫한에게도 ‘우리 안에 부처가 있고 또한 그 부처 안에 우리가 있다’는 점에서 부처는 우리 와 동떨어진 어떤 초월적 타자가 아니다(틱낫한, 2006; 2016). 이와 같은 전환적(대안적) 신관의 확산은 불가피하게 종교 이해의 핵심이 조직·공동체(교회)·제도의 차원으로부터 개인(신앙인)의 ‘영성적 삶’의 차원에로 무게의 중심이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룩크만은 ‘영성적 전환’ 현상을 외재적 권위에서 연원하는 전통적 의미의 ‘거대한 초월성(great transcendence)’이 위축되어 다양한 ‘수축 된 초월성(shrinking transcendences)’으로 전환되는 것으로 본다 (Luckmann, 1990). ‘실재의 사회적 의미구성’을 중시하는 현상학적 사 회학자인 룩크만의 관점에서, 이 전환은 성스러움의 원천이 사회적 또는 우주적 단위로부터 주체(자아)의 영역 - ‘주체의 성화’라는 방 식을 통해 - 에로 전환된 것이다.

또한 우스노우는 이 영성적 전환의 등장을 전통종교가 제공해 주 었던 ‘정주의 영성(spirituality of dwelling)’이 탈근대 시대의 개인주의 적 추구를 가능하게 하는 ‘추구의 영성(spirituality of seeking)’에 의해 대체되는 상황으로 본다(Wuthnow, 1998). 하지만 우스노우는 ‘추구의 영성’ 유형의 등장은 이 시대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들 두 유형은 역사적 과정에서 특정한 상황과 조건에 따라 부침을 달 리하면서 되풀이 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스노우 가 ‘추구의 영성’으로 규정하는 영성 추구의 현상은 오늘의 미국적 탈근대 문화의 실존 상황과 조건 안에서 생성된 것이다.

다른 한편 하비 콕스는 그리스도교에 관한 한, 영성에 대한 관심 은 초기 ‘신앙 시대(age of faith)’와 로마의 그리스도교 공인 이후 19 세기까지 지속된 ‘믿음 시대(age of belief)’에서도 계속해서 존속해 왔 던 것으로 본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영성적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대하는 영성 부흥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진단한다. 사실 이 현상 은, 나는 ‘영성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다(Spiritual But Not Religious)’라는 이 시대의 점증하는 신앙의 유형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하비 콕스, 2009: 23). 하비 콕스는 영성적 전환 현상을 전통적 의미의 종교를 대체하는 미래형 종교의 전령으로 본다.

이 원규 또한 영성적 전환 현상을 주목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성향 이 질적으로 크게 변화하고 있다고 강조한다(이원규, 2012: 256-285). 그는 지난 2천여 년에 걸쳐 지성, 이성, 합리성 등의 논리에 충실했 던 서구와 북미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자유주의적 및 합리주의적 신앙의 전통이 추구했던 신앙 전통이 이제는 주관적 신앙 체험의 차원과 밀접하게 연관된 감성, 열정, 영성 등의 차원을 중시하는 성 향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본다. 그는 전자의 신앙 유형을 지성과 이 성에 복속하는 ‘머리의 종교(religion of head)’로 보고, 후자를 주체의 영성적 체험을 따르는 ‘가슴의 종교(religion of heart)’로 규정한다.21)

그리스도교에 관한 한, 이 영성 차원에 대한 신앙적 지향의 중요 성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신약 성서의 바울 서신에 나타나 있다 (Sheldrake, 2013: 1-22).22) 당시의 의미론적 맥락에서, 영이나 영성은 물적(physical 또는 material)인 것에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육(flesh) 적인 - 곧 하느님의 영(Spirit of God)에 반대되는 - 것에 대립되는 개 념으로 이해되었다. 바울 이후 초기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영성은 육 체(body)에 상대되는 개념인 영혼(soul)과 유사한 어떤 개념이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에 나타난 어떤 지향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어 졌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영성적(spiritual person)’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그 사람 안에 ‘하느님의 영’이 거하거나 아니면 그 ‘하느님의 영’의 영향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졌다 (Sheldrake, 2013: 2).

이 점에서 ‘그리스도교 영성’은 단순히 신에 대한 지식이나 관념 의 차원에서 정의되는 개념이 아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영성적’ 이라는 것은 그 자신이 믿는 ‘신과의 관계’ - 신(의 현존)에 대한 실 제적 체험이 이뤄지는 관계 - 가 더욱 더 온전하고 충실하게 유지 되도록 해주는 상태를 의미한다. 곧, 영성은 단지 믿음이나 가치의 소유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 영성적인 사람의 믿음의 조합과 가치의 조합이 실제 신앙적 삶 속에 표출되고 체화되어 나타나는 행위나 상태를 의미한다(Sheldrake, 2013: 2-3). 이 점에서 전통 그리스 도교의 영성은 기본적으로 종교와 구별되거나 분리되지 않는 어떤 통합적 상태에 관한 개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 의 본질과 지향성이 앞에서 살펴본 불이론적 신관 및 기도가 지향 하는 바와 상통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이후 서서히 종교적 삶과 영성적 태도 간의 불가분의 관계성에 대한 이해가 점차 차별적으로 구분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Woodhead, 2011). 특히 21세기로의 진입 이후 영성의 의미론적 스펙트럼은 더욱 넓게 다원화되었으며, 더 나아가 영성에 의한 종교(성)의 대체 가능성을 함의하는 논의로까지 이어지게 되었 다(하비 콕스, 2009: 25-30).

맺음말

V.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상호존재신론은 전통 그리스도교 신학의 의례 가운데 하나인 기도 그리고 그와 불가분하게 연관된 영성의 의미를 새롭게 환기시킨다. 그 환기의 근거는 상호존재신론이라는 전환적 신관이다. 앞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논의했듯이, 상호존재신 론은 “서양적” 신관에 대립되는 “동양적” 신관이라는 대안적 의미를 가진다. 이 ‘동양적’ 대안 신관의 주된 의의는 서양신학의 오리엔탈 주의적인 독과점식 신관에 연원하여 일방(향)적으로 생산된 신관의 경계23)를 차원적으로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라는 데에 있다. 요컨대, 상호존재신론의 동양적인 대안적 신관의 의의는 모든 신학은 시대 성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고 성서의 언어를 포함하여 신에 대한 모든 인간의 유한한 언어적 담론은 상징적, 메타포적, 유추적 성격 을 지니므로 어떤 신관도 절대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데에 있다(길희성, 2005: 126).

이제는 서양 중심의 독점적 신관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지역주의 적(regional) 신관이 창출되어야 한다. 상호존재신론은 동양이라는 지 역의 역사·문화적 전통과 환경을 통해 토착화된 ‘대안적’ 신관이다. 이 대안적 신관은 서양 그리스도교의 주류 신관인 초월적 유신론이 갖지 못한 한계와 제한, 곧 신과 세계의 이분화, 신관에 대한 특정 민족이나 문명권의 독점화, 신의 문자적 폐쇄화 등을 극복할 수 있 는 신관이다. 곧 서양의 주류신관이 지닌 비개방성과 배타성, 일원 적 제국주의성을 극복하고 통일적 다원성(plurality)으로 나아갈 수 있 는 새로운 기반이 형성된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의 신관과 불교의 공관을 통해 그리스도교라는 개체가 불교라는 타자의 일부분이 됨 으로써 개별화는 약화되는 반면 인격화는 강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니터는 이 신관을 그리스도교만의 ‘독특성은 계속 유지하지만 이 독 특성은 상호적 의존 속에서 다른 종교들과 관계함으로써 발전하고 또 새로운 깊이를 얻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폴 니터, 1992: 26-7).24) 그런 점에서 특정 문화의 유형이 독점한 일방적 그리스도교 신관에서 다원성이 담보된 통일성을 지향하는 신관으로 전환된 상 호존재신론은 타 문화에 개방적인 대안적 신관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점에서 상호존재신론의 불이론적 기도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의 중요한 전환적 의미를 함의한다. 첫째, 불이론적 기도는 서양 신학의 초월적 유신론에 기초한 기도와는 그 본질과 지향성에 서 큰 차이가 있다. 후자의 기도는 신과 세계, 자연과 초자연, 정신 과 물질, 몸과 영혼을 양분하는 이원론에 의존함으로써 초월적 존재 자로서의 하느님이 세상에 이따금씩 기적적인 방식으로 나타나는 간섭하는 신관을 전제한다. ‘저 너머’, ‘높이’ ‘바깥’에 있는 인격적 존 재나 행위의 주체자로서 대상화된 초월적 유신론에서의 신은 인간 의 기도를 들어주기도 하고 들어 주지 않기도 하는 편협하고 옹졸 한 폭군적 제왕으로 군림한다.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는 신이라 해도 모든 사람들의 청원 기도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도는 들어주고 다른 누군가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는 차별적인 신이다. 이 런 식의 기도는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이 신을 이용해 자신들의 뜻 을 관철시키는 이기적 욕망과 편견, 그리고 폭력을 낳을 수도 있다. 지구상에서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그리스도교의 죄악사들의 역사가 이런 식의 신관과 기도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상호존재신론의 기도는 신과 세계가 단절되어 있지 않고 불이론적으로 “신은 만물 안에 만물은 신 안에 그리고 신과 세계가 모두 인간 안에 내재하며 인간 역시 신과 세계 안에 내재”하는 신 관을 전제한다. 때문에 신은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 사물, 그리고 사건에 선별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우주와 역사의 전체적 방향을 주 도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폴 니터, 1992: 128-9). 그러므로 상호존재 신론의 불이론적 기도는 신과 세계,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물과 사물의 격절 없이, 상호 막힘없이 자기 부정과 소외를 통해 타자와 의 개방성인 ‘사랑하기’이며 나아가 ‘타자되기’가 되어 모든 눈물과 아픔에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기도이다. 이런 기도는 인간의 무 한한 욕망을 충족하려는 폐쇄된 기도가 아니라 욕망으로부터 자유 를 가르쳐 주는 무욕의 기도이고 개인이나 집단의 자기 확장을 부 추기는 기도가 아니라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 기도이다.

두 번째 함의는 동양적 대안 신관으로서의 상호존재신론의 기도 가 갖는 종교(신)학적 의의와 연관된다. 상호존재신론의 불이론적 기 도를 제시한다는 것은 예컨대, 일원론적인 불교가 더 나은 종교인가 아니면 이원론적인 그리스도교가 우수한 종교인가를 가름하는 도그 마적 판단과 선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양자 간의 특성과 차이를 조화롭게 상호 통합된 일치의 상태를 지향해 가고자하는 데에 있다. 곧 상호존재신론의 기도는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이것도 저 것도의 논리를 통해 서로 배우며 상호보완의 길로 나아가는 종교가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인 ‘사랑’의 신론을 통해서 본 기도 이다(이찬수, 2003: 205). 따라서 상호존재신론의 기도는 전통적인 청 원기도의 방식을 완전히 배척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부모, 자 녀들이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그들의 치료와 건강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 자체를 비난할 수 없다. 단지 청원기도가 신을 대상화 하여 전체성을 고려하지 않고 개인의 제액초복만을 목적으로 삼는 극단 이기주의적 기도의 태도를 지양하자는 데 있다.

다른 한편, 상호존재신론의 불이론적 기도는 그 속성상 ‘영성적’ 기도이다. 그리고 이 영성적 기도는 탈근대 사회의 환경에서 나타나 고 있는 ‘주관적 전환’ 현상과 맞물려 촉발되고 있는 지구적 수준의 ‘영성적 전환’ 현상과 맞물려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탈근대적 실 존 상황과 조건에서 개인 주체들은 ‘객관적 진리’ 추구보다는 ‘주관 적 체험’을 강조하는 문화적 성향을 드러낸다. 곧 전통 종교의 신학 적 기초이자 전제인 ‘외적(초월적) 권위’로부터 개인의 정신 내면의 탐구를 통해 찾아지는 ‘내적 권위’로의 전환, 또는 ‘신(하느님)’에서 ‘신적 자아(self-as-god)’로의 전환이 나타난다. 실제로 이러한 전환적 신관과 그에 따른 주체 홀로만의 영적 탐구의 경향은 이른바 ‘영성 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다(SBNR: Spiritual But Not Religious)’라든 지, ‘소속되지 않은 신앙’(Believing without belonging), 혹은 ‘가나안’ 신 도의 증대 등과 같은 종교적 전환 현상과 잘 조응되고 있다.

이상의 논의는 상호존재신론이라는 그리스도교 대안 신관에 따라 새롭게 제시되는 기도와 영성의 전환적 변용의 가능성을 깊이 있게 살펴봄으로써, 탈근대 사회의 실존 상황에서 대두되고 있는 종교의 대체나 변용 또는 종언의 테제를 적극적으로 탐구한 것이다. 이 시 론적 수준의 논의가 새로운 종교이해의 전망을 자극할 수 있는 하 나의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Notes

[1]이 글에서 사용하는 ‘동양적' 신관이라는 표현은 대안적(또는 전환적) 신관에 대 한 논의를 기술적으로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표현 은 현존하는 다양한 동양적(또는 서양적) 신관 모두를 대표하는 의미로 사용되 고 있지 않다.

[2]기도에는 경배의 기도, 감사의 기도, 고백의 기도, 순종의 기도, 그리고 청원기 도 등의 형태가 있다(웨인 스피어, 1990: 17). 이 글에서는 청원기도에 집중한다.

[3]신의 초월성을 필연적인 것으로 규정한 반면에 내재성은 선택적인 것으로 만듦 으로써 자연과 초자연, 신과 세계를 이항 대립적으로 분리하는 초자연적 이원 론이 성립되었다. 이 이원론은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안셀름(Anselm of Canterbury),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칼빈(John Calvin), 라이프니츠 (Gottfried Wilhelm von Leibniz), 그리고 이후 사상가들에 이르기까지 주요 그리스 도교 사상가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김희헌, 2014: 108).

[4]“Interbeing”에 대한 틱낫한의 설명을 원문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Interbeing” is a word that is not in the dictionary yet, but if we combine the prefix “inter-” with the verb “to be,” we have a new verb, inter-be(Nhat Hanh, 1988: 3).

[5]공의 어원은 산스크리트의 슌야(sunya)로 그 뜻은 ‘증가한다(to swell)’, ‘확장한다 (to expand)’는 의미의 ‘슈비(sbi)’에서 생성된 단어이다. 공(空)은 존재론적으로 없 다는 것을 의미하는 무(無)가 아니라 모든 상이 상호 연계된 상태에서 끊임없이 운동, 변화하는 존재의 성격을 가리킨다(양윤희, 2007: 248).

[6]이찬수에 의하면 여기서 영이란 귀신이나 죽은 이의 혼령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들을 살아있게 해주는 생명력에 대한 종교적 표현이 다(이찬수, 2014: 12).

[7]보그와 이찬수는 이런 신 이해를 범재신론(panentheism)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상 호존재신론은 범재신론과는 광의적 개념에서는 같지만 협의적 개념에서는 구별 된다. 광의적 개념에서 범재신론과 상호존재신론은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 시에 인정한다는 점에서 같지만 범재신론과 상호존재신론은 초월성에 대한 이 해에서 약간 다르다. 전자는 신의 초월성을 시원적 본성에서 찾는다면 후자는 심층범신론과 같이 모든 신성을 자연의 깊이, 곧 자연의 무의식적 측면에 둔다 (이 차이점에 대해서는, 김희헌 “다석 유명모의 자연주의적 유신론에 대한 소고 (小考): 과정범재신론 및 심층범신론과의 대화”, 신학논단(87), 2017쪽을 참고할 것).

[8]길희성은 하느님이 만물 위에 군림하는 초월자가 아니라 우주만물을 산출하는 궁극적 원천으로서의 무한한 힘으로 보고 신을 우주의 모태 같은 어머니(womb, matrix)로 규정하면서 그것을 힌두교에서는 브라흐만(Brahman)으로 도가사상에서 는 도(道) 혹은 무(無)와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

[9]불교의 나마루빠(Namarupa, 名色)여기에 해당된다. 산스크리트어로 나마(정신)와 루빠(육체)가 합쳐진 단어로 몸과 마음이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뜻한다(틱낫한, 2006: 104).

[10]이영미는 이런 사전적 정의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상호적 대화의 성격을 띠는 극히 일부분적인 기도 이해라고 말한다.

[11]기도의 종류에는 개인적 형태의 기도와 예전을 통해 드리는 공동체적 기도로 구분된다. 전자에는 감사기도, 찬양기도, 탄원기도, 서원기도 등이 있고 후자에 는 신앙고백 기도, 죄책고백의 회중기도, 목회기도, 중보기도, 축복기도 등이 있 다. 특히 한국교회만의 특별한 기도 형태인 새벽기도, 철야기도, 그리고 산기도 가 있다. 청원기도에도 개인적인 것이든 집단적인 것이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달라는 적극적 청원과 원하지 않는 어떤 것을 피하게 해달라는 소극적 청원의 형태로 나뉜다(이영미, 2015: 41; 김병훈, 2008: 2; 길희성, 2005: 119).

[12]보그는 이러한 타자화, 대상화 때문에 하느님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면서 그 이유를 부버의 “나-당신(I-It)”의 모델로 설명한다. 인간은 자라면서 언어에 기초 한 사회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언어는 본질적으로 실재를 범주화하고 분할 한다. 사회화가 성공적이면 성공적일수록, 문화가 만들어낸 말들과 범주들이 우 리의 인식을 형성하고 제한하면서 “나-너(I-You)”의 관계 속에서 만난 실재를 차 단하면서 “나-그것(I-It)”의 세계로 빠져들게 만든다(마커스 보그, 2001: 175).

[13]유광석에 따르면 신이 있는 종교(goldly religion)들에서 교환관계의 특징이 더 뚜렷이 나타난다. 그 이유는 신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보상의 질과 양이 교환관 계의 형태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합리적 인간이 신(들)과의 거래에서 추구하는 현세적 보상(worldly reward)을 넘어 궁극적으로는 내세적 보상(otherworldly reward) 을 얻고자 하는데 있다(유광석, 2014: 42).

[14]이 입장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학자로 스타크(R. Stark)와 핑키(R. Finke)가 있다 (Stark and Finke, 2000).

[15]김혜옥은 이 경험을 불교에서는 ‘공’이라 하고 천주교에서는 ‘탈혼’으로 표현하 는데 그 표현을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이들의 경험은 마치 한 사람의 체험처럼 유사하게 진술되었다고 밝힌다.

[16]생명의 영은 정신이나 물질 같은 어떤 하나의 성질로 규정될 수 없는 복합적 성격을 띤 힘으로 정신과 물질, 육체와 정신의 이원적 대립을 초월하며 모든 것을 아우르는 힘이다.

[17]니터는 묵상(meditation)과 관상(contemplation)을 비교하면서 관상이 하느님과의 합일에 더 적절한 수행이라고 본다. 묵상은 하느님과의 합일 체험을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것이라면, 관상은 안으로부터, 곧 우리와 하느님의 합일 안에서 보 는 것이다.

[18]이러한 자애심의 기도는 태이의 “신은 지금 여기 있다”에서의 기도에 대한 태 도와 상통한다. 그리스도교의 전통에서 발견되는 이와 같은 ‘자애심의 기도’의 예는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에서 발견된다(틱낫한, 2006: 98-99).

[19]니터는 이런 기도 수행의 아이디어를 티벳 불교의 통렌(tonglen)명상법에서 얻 었다. 통렌 명상은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고, 고통이 실제로 우리를 연결한다 는 불교의 가르침과 타인의 고통이 우리 안에 원래 존재하지만 막혀 있는 자비 와 자애를 타인에게 열어 주는 수단이 된다는 불교의 가르침에 근거한다. 고통 이 고통을 극복하는 수단이 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고통이 우 리의 자연스러운 자애심을 끌어냄으로써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하고, 그럼으로써 타인과 우리 자신을 돕고 우리를 감동시키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폴 니터, 2011, 284).

[20]특히, 힐라스와 우드헤드는 21세기 탈근대적 상황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영성 추구의 경향을 ‘전인적 영성(holistic spirituality)’이라고 규정한다(Heelas & Woodhead, 2005:12-32). ‘전인적’이라는 의미가 조화, 균형, 흐름, 통합, 상호작용, 일치(하나 됨), 집중 상태 등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전인적 영성’은 개인 주체가 감정적, 정신적, 육체적, 영적인 측면에서 조화롭고 상호 통합된 일치의 상태를 지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전인적 영성의 본질과 지향성이 개인뿐만 아 니라 타자 모두를 포함하는 만유일체론적 지향을 보인다는 점에서 니터와 틱낫 한의 불이론적 신관이 지향하는 영성적 기도와 크게 상통한다.

[21]머리형 종교는 다른 말로 지성 종교를 뜻하며,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근본주 의와 자유주의 신앙 유형이다. 근본주의 신앙은 교리적 교조적 조항이나 신학 적 명제들에 집착하는 반면, 자유주의 신앙은 지성적이고 합리적인 신앙 체계 를 고집하는 성향을 갖는 것으로 요약된다(이원규, 2012: 256-277; 하비 콕스, 2009: 206-222).

[22]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영성의 어원은 라틴어 spiritualitas 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이 spiritualitas의 어원은 영(spirit)을 뜻하는 그리스 어 pneuma에 있으며, 이 용어는 최초로 바울 서신에 나타나 있다.

[23]여기에는 초월적 유신론, 범신론, 범재신론, 다신론, 단일신론, 유일신론, 무신 론 등이 있다.

[24]보기를 들어, 중국의 그리스도교 사상가인 오뢰천(吳雷川)은 유가의 경(敬)과 성(誠)을 그리스도교의 기도와 비교해 양자 간의 공통점을 주목한 바 있다. 최 근에 이를 연구한 강지연은, ‘기독교인은 기독교의 정신을 중국 전통문화와 함 께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화적 토대가 그리스도교 가 아닌 유교적 배경을 갖는 동양에서의 그리스도교는 그 지역의 종교와 문화 적 속성에 적합한 토착화된 그리스도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 히 두 종교 간의 공통점을 찾아 공통요소를 가진 종교를 만들자는 종교혼합주 의가 아니라 상호 의존 가운데 통일적 다원성을 지향하자는 것으로 해석된다 (강지연, 2017; 2012).

김종만

은 영남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고려대학교에서 한국사를 공 부하고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교회사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학교 종교학과에서 박사수료를 했으며, 현재 배재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연구 관심은 종교간 대화에 있으며, 특히 불교와 그리스도교에 관심 을 가지고 후속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최근 논문으로 “‘상호존재 신 론’(interbeing-theism) - 틱낫한(Thich Nhat Hanh)과 폴 니터(Paul F. Knitter)의 인터빙(Interbeing) 개념을 중심으로”(2018)가 있다.

송재룡

은 영국 브리스톨대학교 사회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경희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연구 관심은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 전망에서 종교, 지식, 문화, 윤리 등의 주제를 다 루는 데에 있다. 최근 논문으로, “유교와 기독교의 초월 지평 비교”(2017), “종교 및 종교성이 사회정치적 참여에 미치는 영향”(2015), “유교의 문화언 어 습속과 권력현상: 존비어체계의 '문화적' 권력성을 중심으로”(2014), “종 교와 사회 발전: 잉글하트의 수정 세속화론과 관련하여”(2013) 등이 있다.

References

1.

강지연 “오뢰천 기독사상 중 중국적 수양론.” 『동방학』 2017 37. 67-87

2.

강지연 “오뢰천의 기독교와 유교 비교 연구 — 논어, 중용 해석 을 중심으로.” 『동방학』 2012 24. 265-287

3.

강현석 “개신교와 불교 기도문에 나타나는 호칭어와 지칭어의 비교 연구.” 『사회언어학』 2013 21. 25-54

4.

강현석 “기독교와 불교 기도문의 사회언어학적 비교 연구 -문 형, 화행과 청자 경어법을 중심으로.” 『사회언어학』 2012 20. 1-31

5.

김동호 “동학의 21자 주문과 기독교 주기도문의 상징성과 소통 성 고찰.”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2011 48. 273-314

6.

길희성 『신앙과 이성 사이에서』 2015 세창출판사

7.

길희성 『보살예수-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창조적 만남』 현암사 2004

8.

길희성 “하나님을 놓아주자“『새길이야기』 2005 도서출판 새길

9.

김병훈 “기도의 본질에 관한 심층적 고찰.” 『신학과 실천』 2008 15. 4. 181-210

10.

김웅래 “무신론자들의 신.” 『누리와 말씀』 2015 38. 191-224

11.

김종만 유광석 “‘상호존재신론’(interbeing-theism) - 틱낫한(Thick Nhat Hanh)과 폴 니터(Paul F. Knitter)의 인터빙(interbeing) 개념 을 중심으로.” 『신학과 사회』 2018 32. 137-180

12.

김희헌 『민중신학과 범재신론』 너의 오월 2014

13.

김희헌 “다석 유명모의 자연주의적 유신론에 대한 소고(小考): 과정범재신론 및 심층범신론과의 대화.” 『신학논단』 2017 87. 93-117

14.

김혜옥 “불교명상과 천주교 관상기도 경험에 관한 현상학적 비 교연구(A Phenomenological Comparative Study on the Experience of Buddhist Meditation and Catholic Contemplation).” 서울불교대학원 대학교 상담심리학과 박사학위논문(미간행) 2016

15.

송재룡 “‘영성 사회학’ 테제의 가능성: 쟁점과 전망.” 『사회이론』 2013 44. 257-289

16.

양윤희 “공(空)의 관점에서 본 『천 에이커의 땅』.” 『동서비교문학저널』 2007 17. 247-266

17.

유광석 『종교시장의 이해』 2014 다산출판사

18.

이영미 “구약성서와 기도 - "우리"의 고백기도(애 3:40-47; 느 9:32-38)를 통해 본 성서적 기도.” 『신학연구』 2015 52. 41-66

19.

이원규 『머리의 종교에서 가슴의 종교로』 2012 KMC

20.

이찬수 『유일신론의 종말, 이제는 범재신론이다』 동연 2014

21.

이찬수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다산글방 2003

22.

전명수 “영성과 힐링의 사회적 의미: 종교 사회학적 접근.” 『원불교 사상과 종교문화』 2015 64. 1-34

23.

보그 M.Borg 『새로 만난 하느님』한인철 역 2001 한국기독교연구소

24.

스피어 W.Spear 『기도의 신학: 기도의 성서적 교훈에 관한 체 계적 연구』 지인성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0

25.

낫한 T.Nhat Hanh 『기도』김은희 역 2006 명진출판

26.

낫한 T.Nhat Hanh 『기도의 힘』이 현주 역 2016 불광출판사

27.

낫한 T.Nhat Hanh 『귀향』 오강남 역. 모색 2001

28.

니터 P.Knitter 『붓다 없이 나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었다』 정경일·이 창엽 역. 클리어마인드 2011

29.

니터 P.Knitter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변환 역 1992 한국신학연구소

30.

스타크 R.Stark 『종교경제행위론』 유광석 역 2016 북코리아

31.

콕스 H.Cox 『종교의 미래』 김창락 역. 문예 2010

32.

Carrette Jeremy KingRichard Selling Spirituality: The Silent Takeover of Religion 2005 LondonRoutledge

33.

Davie Grace HeelasPaul WoodheadLinda Predicting Religion 2005 HampshireAshgate

34.

Fasching J.Darrell DechantDell M. LantiguaDavid Comparative Religious Ethics: A Narrative Approach to Global Ethics 2011 OxfordWily-Blackwell

35.

GiuseppeGiordan Flanagan Kieran C. JuppPeter “Spirituality: From a Religious Concept to a Sociological Theory.” A Sociology of Spirituality 2007 HampshireAshgate 161-180

36.

GiuseppeGiordan “The Body between Religion and Spirituality.” Social Compass 2009 56. 2. 226-236

37.

GiuseppeGiordan H. SwatosWilliamJr Religion. Spirituality and Everyday Practice 2011 LondonSpringer

38.

Heelas Paul WoodheadLinda The Spiritual Revolution: Why Religion is Giving Way to Spirituality 2005 OxfordBlackwell

39.

Heschel JoshuaAbraham HeschelSusannah Moral Grandeur and Spiritual Audacity: Essays of Abraham Joshua Heshel 1996 New YorkFarrar, Straus and Giroux

40.

Houtman Dick AupersStef “The Spiritual Turn and the Decline of Tradition: The Spread of Post-Christian Spirituality in 14 Western Countries. 1981-2000” Journal for the Scientific Study of Religion 2007 46. 305-320

41.

Luckmann Thomas “Shrinking Transcendence. Expanding Religion?” Sociological Analysis 1990 50. 2. 127-138

42.

HanhNhat Thick LevittPeter The Heart of Understanding: Commentaries on the Prajnaparamita Heart Sutra 1988 CaliforniaParallax Press

43.

Sheldrake Philip Spirituality: A Brief History 2013 OxfordWiley-Blackwell

44.

Stark Rodney FinkeRoger Acts of Faith: Explaining the Human Side of Religion 2000 Berkeley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45.

Woodhead Linda GiordanGiuseppe H. SwatosWilliamJr “Spirituality and Christianity: The Unfolding of a Tangled Relationship.”Religion. Spirituality and Everyday Practice 2011 LondonSpringer 1-21

46.

Wuthnow Robert After Haven: Spirituality in America Since the 1950s 1998 Berkeley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Article Information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