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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법제도에서의 공감과 소통적 구조

 

Abstract

소통은 상호간의 공감에서 시작되어 서로의 처지와 갈등 혹은 문제점 을 이해하고 같이 느끼며 해결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소통은 공감에 서 비롯되며 이를 통해 얻은 진단과 처방은 서로간의 배려로 결과 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계산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타인을 돕는 배려행위는 장래에 내가 혹은 내 후손일지라도 받을 수도 있는 일종의 보험인 셈이 다. 즉 배려의 하한선은 개체가 극한 상황에 내몰려 공존의 질서에 저항 하려 의욕 하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 될 것이며, 그 상한선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사회부조를 권리로 착각하지 않을 수준에서 멈추어야 한다. 우 리는 공감과 소통과 배려의 의미와 상호관계를 조선왕조의 각종 제도에 서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조선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언로를 개방하고 공개적인 토론과 합의를 통해 국론을 정립하는 소통문화를 중시했다. 이는 정치의 장을 공적 영 역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치현장에서 공의 영역을 확대하고 감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소통적 구조가 잘 정비되어 기 능하고 있어야 한다. 대간에 의해 제기되는 공론은 왕도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의견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소통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려는 태도 는 조선시대의 소송구조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대부분의 소송은 당사 자 주의를 원칙으로 했다. 즉 소송의 개시와 종결은 물론이고 심리의 진 행조차도 당사자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을 정도로 철저한 당사자 주의 였다. 실체적 진실을 확인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당사자 간에 충분 한 진술과 의견표명이 우선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조선왕조는 통치 집단의 권력독점을 제한하기 위한 각종 권력견제장 치가 섬세하게 마련되어 있었고 대개의 경우 이러한 장치는 별 문제없 이 잘 기능했다. 현실의 문제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상부에 보고되었고 권력담당자들은 의도적으로 이러한 통로를 차단할 수 없는 구조를 지니 고 있었다. 이는 국가체제의 항구적 존속을 위한 최선의 길이 바로 이와 같은 권력의 적절한 안배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고 처방 해 대처하는 길이라는 점을 잘 알 고 있었다는 의미다. 오늘날처럼 정권 이 바뀔 때마다 자행되는 정치보복의 악순환은 시대정신에 대한 공감의 불일치, 소통의 부재, 그리고 상대에 대한 배려심의 전무에서 비롯되는 지극히 저급한 병리적 현상이다. 극소수 집단의 이러한 병폐가 전체의 문제로 오인되는 것이 바로 소통의 진정한 문제인 것이다.

Translated Abstract

The communication begins with mutual empathy and appears in the form of trying to solve it as if you understand each other's circumstances, conflicts and problems. Communication is done from empathy, and consideration is given to each other through the diagnosis and the prescription obtained through communication. Man is an instinctive calculation. Therefore, my consideration that will help other people is a kind of insurance that can be obtained by me or even my descendants. In other words, the lower limit of consideration is to be a level at which he will not resist the coexistence order even in extreme circumstances, and the it's upper limit is stoped at a level which he does not misunderstand the company aid given to him by society as his no right. We can better understand the meanings and interrelationships of empathy, communication and consideration in the various systems of the Joseon dynasty. The dynasty emphasized the communication culture which opens public media from the early stages and establishes a public opinion through public debate and consensus. This is because they regard the states of political affairs as the public ground. Therefore, in order to enlarge and monitor the area of the public opinion at the political scene, it is necessary that the communication structure is well maintained and functioning more than anything else. The public opinion brought by the Daegan臺諫 was considered to be an important opinion that the king can not ignore. Attitudes to try to solve the conflict through communication are also frequently seen in the judical proceeding structure of the Joseon Dynasty. Not only the beginning and the end of suit but also the proceedings of court hearing is proceeded by the parties in the lawsuit. In the case of the Joseon dynasty there were various kinds of institutes to restrict the power of the governing group in many cases, these devices worked well without problems. The current problem was reported to the upper part via a various way, and the ruling group had a structure that could not intentionally block such a passage. As in today's circulation, the circulation of political retaliation that is done is due to the inconsistency of empathy of the era, the absence of communication, and the lack of compassion of others. It is from the absence of communication that misunderstanding the ills of governing group as a matter of the entire people.


이끔말

I.

소통의 부재는 이 시대의 사회병폐를 진단하고 내린 국민적 처방 전 이다. 모든 부조리와 병폐가 소통의 부재, 즉 불통에서 비롯되었 다는 데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도대체 소통이 무엇 이 길래 좁게는 한 사람의 사회병리적인 범죄행위의 원인이 되면서 크 게는 국가적 재난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걸까? 나의 기쁨과 즐거움 혹은 불행과 억울함 등을 또는 사안의 진실을 마음껏 주위에 알리 고 함께 나누고 진단하며 대처할 수 있는 일련의 전 과정을 소통이 라고 한다면, 이는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이 누구나 항상 행 하면서 살아가는 사회적 인간의 모습이다.

소통은 상호간의 공감에서 시작되어 서로의 처지와 갈등 혹은 문 제점을 이해하고 같이 느끼며 해결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는 인간 사회의 모든 갈등의 해결은 그것이 조언이든 조정이든 더 나 아가 심판 혹은 국가 권위에 의한 판결이든, 모든 갈등의 해결은 소 통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소통은 전 인류적인 사 회구성의 기본원리인 것이다. 소통을 위해 언어와 문자가 등장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각종 사회구성이 견고하게 짜여 져 오늘에 이르 게 되었다. 또한 소통의 정도에 따라 집단은 견고할 수도 있고 느슨 할 수도 있으니 소통의 반면은 갈등과 소외, 더 나아가 범죄의 현상 으로 나타난다. 결국 소통의 부재는 인간의 이기심의 발로로 볼 수 도 있게 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거기서 비롯되는 일련 의 문제와 결과를 파악할 수 있음에도 이기심이 충만한 인간이나 집단은 이를 의도적으로 외면하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 이는 당하는 쪽의 소외와 멸시 불이익 등으로 나타나고 가진 자 쪽에서 는 많은 이익추구로 결과 된다. 즉 부정의가 가시화되게 된다. 정의 감은 인간 모두가 지니고 있는 균형 감각이다. 즉 정의감은 이성적 인 논리적 추론 과정을 거쳐 이르게 된 판단이 아니고 그런 현상을 목격하는 그 순간 솟아오르는 감성적이고 즉시적인 직관의 산물이 다. 이성적 추론은 단지 이를 정당화하거나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 작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비교적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사회를 이루었던 조선왕조 의 면모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조선시대는 지금의 우 리에게도 매우 유용한 각종 정보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통 은 공감에서 비롯되며 이를 통해 얻은 진단과 처방은 서로간의 배 려로 결과 된다. 이하에서는 공감과 소통, 그리고 배려의 관계를 살 펴보고 조선시대의 국가제도와 사법제도에서 이러한 모습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었는가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공감과 소통의 관계

II.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아온 것은 인간의 본성에 기인한 본능적 행위이다. 독립성 개별성 혹은 주체성으로 무장된 이기적 존재인 인 간이 어떻게 전 지구를 지배할 수 있을 만큼 상호 결합된 사회구조 를 이루어 오늘에 이를 수 있었는가?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아온 이유에 대해 고금 이래 수많은 설명이 있어왔지만 이 모든 설명의 궁극적 근거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나는 인간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 는 심리적 기제인 ‘공감’(empathy)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공감은 공감각, 즉 사물에 대한 감각적 인식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 물에 대한 감각적 인식을 공유할 수 있으려면 유사한 사태에 대한 감각인식이 유사하게 진행되고 추론될 수 있는 심리적 조건이 공유 되어야 하며 이러한 유사반응 기제에 의해 그러한 경험이 공유되어 야 한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생리적 반응기제가 인간 일반 에 공통될 경우에만 이루어 질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현 인류는 지구상에 등장했다가 절멸해 간 많은 원시 인류종족 중 특정 공통 조상(Homo Sapiens Sapiens)으로부터 이어진 후손들이기 때문이다.

공감은 사물에 대한 인지적 감각의 산물이다. 이러한 감각이 하 나의 규칙처럼 일정한 패턴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생명본능에 의한 기억력 때문이다. 즉 생명보존과 번성에 가장 적합한 상태를 유지하 고자 하는 생명현상의 일환으로 최적화된 사태에 대한 강한 기억이 사물에 대한 감각적 인식을 일정한 패턴으로 구성해 기억 속에 온 장한다. 공감은 바로 이와 같은 사태에 대한 기억과 감각적 추론을 통해 타자를 이해하는 심리적 기제다. 인간 심리에 대한 경험적이고 과학적인 이해는 동서양이 마찬가지인 듯하다. 곽점초(묘郭店楚墓) 죽간본(竹簡本)에 의하면 맹자 이전의 초기 원시유가는 자연스럽게 전개되는 인간의 감정에서 도덕예의가 비롯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무릇 사람에게는 누구나 성(性생명)이 있고 거기에는 심(心)이 작용 한다. 심이 작용하지 않으면 그 심이 지향하는 지(志)도 고요해 진다. 심은 외부의 사물과 마주한 이후에야 움직이게 되는 데 그 관계에서도 나에게 이롭고 기쁘다고 생각되어야 행동으로 전개된다. 그런 행동은 반복적으로 학습되고 나서야 능숙해 진다. (중략) 도(道)는 처음에는 정 (情)에 가까웠지만 학습과 성찰을 쌓아 갈수록 의(義)에 가까워진다. 나 와 사물이 만나면 생명에 지혜가 생기고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와 다 시 나의 감정과 지성의 틀이 된다.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성에서 나오는데 성이 그렇게 좋아하고 미워하게 만드는 것은 외부의 사물이 다. 나와 내가 아닌 것과의 교섭에서 선(善)과 불선(不善)이 갈라지게 되 는데 이는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무릇 성은 심정을 발동시키는 주체지만 그것을 움직이고 작용하게 만드는 것은 외부의 사물이다.”1)

다윈도 이에 해서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즉 인간의 도덕적 품 성은 사회를 이루고 사는 동물이 생존과 종족의 번식을 위해 필히 갖추어야할 본능적 생리기제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뚜렷한 사회적 본능을 타고난 동물이라면 어떤 동물이라도(중략) 지 적 능력이 사람만큼 혹은 그에 가깝게 발달되자마자 필연적으로 도덕 적인 의식이나 양심을 갖게 될 것이다.

(Darwin, 1871: 71-72)

이러한 공감의 사회성은 인간에만 고유한 정신세계의 산물은 아 니다. 이는 그간 많은 동물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보고되었듯이 군집 생활을 하는 많은 포유류 군에서도 확인되는 사실이다. 우연한 실수 로 대장의 발을 밟은 어린 원숭이가 심하게 구타를 당하고 고통에 절규하고 있으면 예외 없이 또래의 동료들이 모여들어 심각한 표정 으로 위로하는 모습이 종종 목격된다. 공감의 정도를 강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대부분 혈연관계에 있는 개체들 간에 일어난다. 혈 연관계 중 가장 강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엄마와 자식 간의 관계 이다. 얼마 전 눈먼 자식을 헌신적으로 기르던 히말라야 원숭이가 일 년 후 동생을 낳자 무방비 상태에 놓인 눈먼 동생을 누나가 열 성적으로 보살피는 장면이 방영된 적도 있었다. 영장류가 아님에도 눈먼 미어캣(Meerkat) 동생을 보살피는 누나 미어캣의 헌신적인 모습 이 보고된 적도 있었다.

공감은 동정과는 다르다. 공감이 직접적인 감각적 느낌임에 반해 ‘동정’(Sympathy)은 공감에서 비롯된 상황판단과 일정한 논리적 추론 과정을 거친 후에 전개되는 일련의 후발적 작동이다. 물론 동정을 전적으로 이성적 추론의 산물이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 도 공감의 무의지성 혹은 즉시성에 비해 다소 의지적이고 사후적인 심리상태임은 분명하다. 즉 공감은 나도 모르게 일어나 솟아나는 감 성이지만 동정은 실천적 행위로 전개될 것을 지향하는 과정을 수반 한다. 그렇다고 하여 동정이 반드시 행위로 옮겨져 결과를 만들어내 는 실천적인 것이라고 할 수만도 없다. 즉 단순히 바쁘다는 핑계로 공감에서 다소 진전된 수준에서 멈출 수도 있고 혹은 간단한 위로 의 말을 건네는 것으로 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Franths de Waal, 2017: 130).

생명의 보존은 안전을 확보하는 일부터 시작된다. 초식동물을 비 롯해 대부분의 피식자들은 안전을 위해 무리를 이룬다. 먹힐 확률이 클수록 즉 안전에 대한 욕구가 클수록 집단의 규모는 커지며 더욱 조직화된다. 안전에 대한 위협이 가시화 되면 집단성은 강화되며 하 나의 개체처럼 똘똘 뭉쳐 외적에 대항한다. 거대한 정어리 떼에서 볼 수 있듯이 외부 공격에 대한 반응양상에서 확인되는 행위일치성 은 모든 군집개체에 한결같아서 심지어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처럼 보일 때도 있다. 이 경우 하나하나의 개체는 전체의 흐름에 철저히 자신을 일치시킨다. 인간이 기필코 유행을 따르려는 사회적 행태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인간이 군집생활을 하던 영장류의 후예라는 진화사의 징표는 이러한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생명보존을 위한 안전과 번성에 관한 동일한 관심과 욕 구는 사회전체를 위한 상호간의 강한 유대감으로 연결되며 마찬가 지로 공감을 통한 다양한 경로의 정보교환 즉 소통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공감은 소통의 필요조건이요 유대감은 공감의 결과 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 처한 사회 환경에 대한 평가 와 희망은 인간 본유의 공감각적인 인식과 공통경험의 정보교환 즉 소통을 통해 이루어지는 불가결의 관계를 맺고 있다. 타자에 대한 적절한 배려가 막연한 ‘은혜 베풂’의 차원을 넘어 삶의 원초적인 본 능적 작용이라는 점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소통과 배려의 이중주

III.

인간은 본능적으로 계산하는 존재다. 즉 내가 건네준 것과 받을 것을 분명하게 칭량하면서 행위 하는 존재다. 이는 이성적인 논리적 계산능력이 아니고 감각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이며 일종의 심리에 내재하는 균형기제의 작동이다. 이는 내가 지금 베풀고 있는 타인에 대한 배려 혹은 협력은 장래 내가 동일한 상황에 처했을 때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 내에서 행해진다는 의미이다. 이점에서 인간 은 본래적으로 협동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점 은 지구상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공통적인 속성이다. 이는 생명체 가 지니고 있는 본질적 속성인 생존환경의 최적화와 번식에의 욕구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생존환경의 최적화에 투여되는 나의 노 력은 최소화시키면서 결과는 극대화 시키려는 계산적 행태가 본능 적으로 작동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생명체는 본질적으로 노예근성 을 구비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테면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주기 시작 하면 이는 집요한 습성으로 지속되고 이렇게 길들여진 야생동물이 포식자일 경우 결국 인간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될지언정 결코 바뀌 지 않는 습성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이 때문에 필연적으로 공존해야만 하 는 인간의 사회적 속성상 타인에 대한 배려는 내재적 한계를 본질 적 속성으로 지니고 있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즉 지금 내가 타인을 돕는 배려행위는 장래에 내가 혹은 내 후손일지라도 받을 수도 있 는 일종의 보험인 셈이다. 이는 타인을 돕는 자는 어떤 식으로든 그 사실을 표현하거나 혹은 심지어 적극적으로 은폐하려는 소극적 태 도를 보일지라도 결국에는 타인에게 알려지기를 바란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익명의 기부천사가 자신의 이름이 알려져 세상의 칭송을 받게 되었을 때 불쾌해 하거나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은 아 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타인에 대한 어떠한 종류의 도움 이든 결국은 장래의 보상을 기대한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 로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이며 무한한 부조는 가능하지도 않고 정의 롭지도 않다. 그렇다면 타인에 대한 배려는 어느 정도가 적정한 수 준일까?

전통사회에서의 각종 구빈제도나 현대의 극빈층에 대한 사회보장 제도 등 일체의 타인에 대한 배려는 원래는 부차적인 삶의 방식이 다. 왜냐하면 생명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 자신의 책임으로 살아가 야하는 고단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개체 생명의 유지와 번성에 대한 일체의 책임은 외부의 타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 그 개체에 내재해 있다. 즉 생명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고단하고 험난한 역정을 스스로 살아 가야한다. 혹자는 가녀린 어린 아기와 모성애가 지극한 엄마의 관계를 들어 이러한 주장을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는 단순한 현상만 보고 본질은 간과한 이해이다. 수정란은 착상하는 순간부터 모체와 부단한 요구와 협상의 줄다리기를 지속한다. 임신 초기의 입덧은 태아가 요구하는 음식과 모체의 식성이 타협에 이르 기 전의 불균형 상태의 반증이다. 어른들이 도저히 어찌할 바를 모 르게 만드는 어린아이의 한없는 귀여움도 실은 어른들의 관심을 자 신에게로 향하게 하여 필요한 생존에의 도움을 저항 없이 베풀어지 도록 만드는 진화의 산물이다. 모든 동물의 새끼 심지어 돼지새끼조 차도 왜 그렇게 귀여울까에 대한 답은 이러한 이유로 설명된다.

그러므로 인간사회에서의 타인에 대한 배려는 내 삶의 경험에서 획득된 정보를 상호간 주고받는 소통과 공감의 토대 위에서 고려되 고 책정되며 행해진다. 즉 배려의 하한선은 개체가 극한 상황에 내 몰려 공존의 질서에 저항하려 의욕 하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 될 것 이며, 그 상한선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사회부조를 권리로 착각하지 않을 수준에서 멈추어야 한다. 결국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 일한 방법은 배려를 공여하는 쪽에서는 혜시를 베풂으로 긍지를 느 끼게 하며 공여 받는 편에서는 여하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부채로 혹은 부끄러움으로 느껴야 한다. 경우에 따라 이렇게 바라볼 수 없 는 상황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기본 형태에서만은 이 러한 관점을 벗어날 수 없다.

이처럼 공감과 소통과 배려는 상호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면서 사 회구조 전반을 형성하는 근본토대가 된다. 그러므로 어느 사회에서 든 일체 제도의 본질과 기능은 공감 소통 배려의 상호관계 속에서 설명되어질 수 있다. 즉 사회의 구조는 얼핏 매우 거대하고 복잡하 며 정교하면서 예측불허의 불확실성으로 여겨질 경우도 있지만 실 은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인간의 본성과 심리기제 자체가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교적 이해 가능한 모습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하에서는 조선시대의 법제도에서 이러한 인간의 속성들 이 어떻게 투영되어 구축되고 작동해 왔는가를 소통의 부분에서 살 펴보기로 한다.

국가통치와 소통

IV.

조선왕조 초기 국가통치에서의 소통

1.

우리 역사상 조선왕조는 비교적 전쟁이 별로 없었고 학문과 과학 이 발달하고 관료주의적 정치제도와 교육 등 각종 제도를 정립하여 합리적인 사회를 이루려 노력한 왕조임에도 각종 비난과 반복하지 말아야할 과오의 역사로 간주되곤 했다. 이는 현대에 닿아 있는 전 왕조라는 점에 더하여 일제에 국가를 잃었다는 막중한 사태가 작용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한 부작용은 일제 강점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일제에 의해 집요하게 전 왕조의 과오를 확대 재생산하여 이를 반도의 백성들에게 가슴 깊이 뿌리내리도록 심어준 일제의 역사교육이다. 해방 후 70여 년이 지났음에도 이러한 식민지 사관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어 그것이 식민사관의 잔재인 지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뿌리 깊다. 이 때문에 조선왕조에 대 한 긍정적 평가는 자칫 민족주의 혹은 국수주의적 관점으로 저평가 되기도 한다.

조선왕조는 소통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국가제도를 운영한 왕조 다. 이러한 사례를 세종의 탁월한 리더십이 소통을 통해 이루어지는 과정을 통해 살펴보자. 세종은 즉위 후 첫 각료회의에서 논의하여 결정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세종 1/8/12).2) 세종은 재임기간 내 내 모든 일을 대신들과 논의 하여 결정했다. 논의하여 결정했다는 기사가 275건 중 세종실록에만 무려 88건이 나오고 있다. 이는 세종 이 대신들과 논의 하여 정책을 결정하는 소통과 타협의 정치를 기 본으로 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김기섭·허경호, 2012: 211).

세종은 즉위 18년에 태종 때 실시되었던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 에서,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로 중앙부서의 편제를 개선했다.3) 이는 국왕과 국정 경륜이 원숙한 의정부 3정승이 논의하여 국정을 처리하는 체제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는 신하들과의 소통을 통해 국정을 처리하겠다는 세종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이다. 이러한 협의 체가 가능했던 것은 세종 자신이 당대 최고의 학자요 행정가이며 국왕이라는 위치에서 원로대신들과 협의라는 통로를 거치면서 자신 의 비전과 정책을 관철시킬 수 있는 자신감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 다. 즉 의정부서사제는 국왕이 대신들과 협의 하여 국가시책을 결정 하는 모습을 띠기 때문에 세종 자신의 탁월한 지식과 판단으로 대 신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킬 수 있는 합리적인 통로요 정당화의 장치 였다. 세종은 심지어 자신에게 강하게 반대한 신하에게 조차 반대의 사를 강하게 피력한 행위를 칭찬하면서 결국에는 승복하게 하는 탁 월한 소통능력을 보이고 있다. 세종의 이러한 면모는 백성들과의 소 통을 위한 한글창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간으로서의 마땅한 도리를 알게 하여 풍속을 바르게 하는 것” 이 “나라를 가진 자가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세종실록 16/4/27)이 라고 자신의 역할을 밝혔듯이, 세종은 민도(民度)를 성숙시켜 조선의 독창적이고 실용적인 문화를 부흥시키기 위해 삼강행실도를 간행해 널리 보급하고 백성들의 소통을 위해 비밀리에 홀로 훈민정음을 창 제하여 이의 보급을 매우 강력하게 관철시켜 나갔다. 이는 겸손하며 뒤로 물러서는 온화한 태도를 보이던 세종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면모였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세종의 카리스마 넘치는 태도는 백성들의 소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애민관의 발로이다(오채원․허 경호, 2012: 210). 세종은 12년에 새로운 토지세법을 제정할 때 이를 사전에 가능한 한 많은 배성들에게 물어 타당성 여부를 조사하게 했다. “정부·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함(前銜) 각 품관과, 각 도의 감사·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閭閻)의 세민(細民)에 이르기 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4). 직접 농사짓는 백성 은 물론 노비에게까지 여론을 조사하도록 명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왕위에 오른 이래로 정사를 하는 데는 부지런히 힘쓰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이에 상참(常參) 조계(朝啓) 윤대(輪對)를 시행 하여 날마다 여러 신하를 접견하고 모든 서무(庶務)를 친히 결재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런 까닭으로 형옥(刑獄)의 판결이 지체됨이 없고 모든 사무가 폐기되지 않았다.”5)

이처럼 세종은 32년 재임기간 내내 언제나 일체의 국정을 대신들 과 심도 있는 토론과 협의 설득으로 결정하여 집행하는 초극적인 인내심과 근면함을 잃지 않았다. 하급관료의 비판도 겸허히 경청했 으며 심지어 국왕의 의견에 반대한 점을 높이 사 이를 칭찬하기도 했다. 또한 허명과 거짓 위안을 극도로 싫어해 정책결정의 토대가 되는 현안에 대한 정확하고 실질적인 조사를 매우 중시했다(박현모, 2009: 125). 이 때문에 직급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들도 자신의 견해 를 밝힐 수 있었고 왕과 신료 그리고 백성들 사이에는 상호 신뢰감 이 널리 확산되어 깊이 뿌리내렸다. 그 결과 사회 전체에 솔직하고 개방적인 의사소통이 촉진되어 많은 정치적 난제를 원활하게 해결 할 수 있었다(김영수, 2009: 35). 조선 왕조는 왜 이처럼 소통을 중시 해야 했던 것일까? 그것은 정치의 장을 공적 영역으로 이해하고 있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교왕국 조선의 소통적 정치제도의 모습을 살펴보려면 공과 사의 영역에 대한 사고를 확인해 봐야 한다.

유교철학에서의 공(公)과 사(私)

2.

서주 초에 공은 도덕적 평가가 내재된 개념으로 사용되어 오긴 했으나 공이 사와 대비되면서 그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서라고 보아야 한다. 이는 혼란했던 당시의 사회상과 관련되어 공무에 종사하는 관료들의 공정한 통치행위에 대한 기대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는 공자보다 맹자가, 맹자보 다 순자가 엄격한 공사의 구분 혹은 공선사후를 강조하고 있는 점 을 보아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전국시대에 공은 의(義)와 사는 리(利)와 연용되면서6) 역용(易庸:周易과 中庸)의 우주론적 차원으로 확장시켜 도덕적 가치성을 논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과정의 일환으 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후에 송명이학(宋明理學)에서 중요 하게 논의될 의리지변(義理之辯)의 토대가 되고 있다.

인간을 사회적 인간으로 이해하고 있는 원시유가의 입론을 우주 론에까지 확장시킨 성리학은 한 개인의 마음과 행동일지라도 그것 이 자연의 이치에 합당하게 이루어진 것이라면 공의 영역으로 이해 한다. 즉 좁게는 인류사회 전체의 운용이 공의 영역이고 넓게는 대 자연을 포함한 우주 전체의 운용이 공의 영역이 된다는 것이 성리 학자들의 생각이다. 장횡거(張橫渠)의 글에 답한 유명한 정성서(定性 書)에서 정명도(程明道)는 인(仁)을 온 우주 생명의 조화와 균형 발 육의 가치를 총체적으로 포괄하는 최고의 상위개념으로 위치 짓고 있다. 다음은 그 내용의 일부이다(이재룡, 2014: 165 이하 인용).

천지 운행의 한결같음은 그 천지의 마음을 만물에 두루 미치면서도, (사사로운) 마음이 없으며, 성인의 한결같음이란 그 정을 가지고 모든 일에 순응하여 이루어 내면서도 (사사로이 대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군자가 힘써 배워야할 학문 중에, 경계가 탁 트여 (천지의 마 음처럼) 큰 공정함으로 사물을 대하게 되어 어떠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에 순응해 풀어나갈 수 있게 되는 경지의 학문을 배우는 것 만한 것 이 없습니다.7)

성리학적 입장에서 볼 때 개인의 일이던 가정의 일이던 그것이 우주 전체의 원리에 입각해 있으면 공의 영역이고 반대로 외적으로 는 공무에 해당하는 일일지라도 동기와 자세가 우주의 원리에 의하 지 않으면 사적인 행위로 간주되게 된다.8) 선진유가(先秦儒家)의 공 사관계가 공선사후의 관념 및 의를 앞세운 도덕함양에 있었다면 성 리학은 여기서 더 나아가 천리(天理), 즉 공적 세계를 보존 함양하고 인욕, 즉 사적 세계를 제거하기 위한 도덕공부를 강조하고 있다.9) (김기현, 2002: 63)

전체적인 사회시스템의 구조에서 행해지는 역할기대와 그에 상응 하는 제도화된 권력의 행사가 전개되는 장이 곧 공의 영역이다. 그 러나 이는 자칫하면 권력남용의 소지가 언제나 내재되어 있어서 끊 임없는 견제와 자성을 필요로 한다. 성리학자들이 개인적 감정에서 생겨나는 이기심을 억제하고 공적 마음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는 일 관된 주장은 단순한 도덕적 심성계발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와 맞물려 있는 현실적인 정치적 요청이었다. 그러므로 유가철학에서는 사회적 관계를 교육받는 가정이야말로 천리의 올바름을 체득할 수 있는 곳이니 가정은 공적 영역의 기초적인 터전으로 간주된다.(김기현, 2002: 65) 끊임없이 공사를 구별해야 한다는 문제는 이를 도덕 적 측면에서 조망하던 아니면 개인주의적 자유권확보와 관련지어 설명하던 결국에는 정치적 권력남용과 직 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 결국 공사관계의 종착지는 정치적 권력남용을 어떻게 제한하고 이 를 원칙에 맞게 행사되도록 유도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현장에서 공의 영역을 확대하고 감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소통적 구조가 잘 정비되어 기능하고 있어야 한다. 모든 국가제도는 말할 것도 없이 공선사후의 국가행정을 도모하기 위한 상호간 감시와 견제를 통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이 효율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국가행정 각 부문 간은 물론이고 백 성들의 삶에 대한 분명한 파악이 전제되어야 한다. 결국 국가 제도 및 백성들의 사회적 삶 전체의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삶의 가능성은 각 부문 간의 소통의 정도에 좌우된다고 하겠다.

공론정치의 소통구조

3.

조선은 처음부터 공론정치를 기본 정치원리로 하여 건국되었다.10) 조선 건국의 설계자인 정도전은 국왕 중심의 절대적 왕정체제를 지 양해 재상 중심의 치상(置相)제도를 염두에 두었다. 이는 군주가 언 제나 현명할 수만은 없음에 비해 어느 시대든 가장 지혜로운 자는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용열한 군주와 지혜로운 재상 간에 권력 을 분담해 상호 보완하고 견제할 수 있는 장치로 이해하고 있는 것 이다. 마찬가지로 국가의 각종 통치구조 상호간에도 감시와 비판 및 보완이 가능할 수 있는 구조로 이루어져야 한다. 정도전은 이러한 이유로 대간을 설치하여 모든 정치적 사안에 대해 왕과 논쟁할 수 있는 권한을 간관에게 부여했다. 이는 소통을 정치의 근본 문제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 듣고 보는바 직사(職司)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홀로 재 상만이 행할 수 있을 뿐이요, 간관만이 말할 수 있을 뿐이어서, 간 관의 직위가 비록 낮다고는 하지만 재상과 동등하다. 천자가 ‘안 된 다.’ 하더라도 재상은 ‘됩니다.’ 할 수 있으며, 천자가 ‘그렇다.’ 하더 라도, 재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할 수 있으니, 묘당에 자리 잡고 앉 아서 천자와 더불어 가부(可否)를 상의할 수 있는 자가 재상이다. 천 자가 ‘옳다.’ 하더라도, 간관은 ‘옳지 않습니다.’ 할 수 있으며, 천자 가, ‘꼭 해야겠다.’ 하더라도, 간관은, ‘반드시 해서는 안 됩니다.’ 할 수 있으니, 전폐(殿陛)에 서서 천자와 더불어 시비를 다툴 수 있는 자가 간관이다. 재상은 그 다스리는 도(道)를 마음대로 행하며, 간관 은 그 말할 바를 마음대로 행하매, 말도 행해지고 도(道) 역시 행해 진다. 구경(九卿)과 백집사(百執事)는 하나의 직책을 지키는 자들이 라 한 직분의 소임만을 맡으나, 재상과 간관은 천하의 일을 엮으니, 또한 천하의 책임을 맡은 것이다.11)

조선정치에서 공론은 왕도 복종해야 하는 국가의 최고 의지라는 합의가 존재했다. 군주는 언제나 언관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그 제안이나 간청을 받아들이는 것을 도리로 여겼으며 언관은 궁중 에서만 지내는 군주가 백관 및 백성과 소통할 수 있도록 사이를 이 어주어 언로를 열어주는 것이라는 지배적 인식이 통용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언관은 지위의 고하에도 불구하고 매우 강력한 힘을 발 휘할 수 있었다. 최정호는 공론을 조정대신들의 공론인 조정공론, 지방 유림들의 공론인 산림공론 그리고 중인 서리 및 일반 백성들 의 공론인 여항공론의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최정호, 1986: 98). 특히 조정공론 중 대간에 의해 제기되는 공론은 왕도 무시할 수 없 는 중요한 의견으로 간주되었다. 즉 대간을 아예 국가의 원기로 설 정하고 나아가 유일하게 공론이 소재하는 곳으로 여긴 것이다(김영주, 2010: 54).

우선 언관은 선출과정에서부터는 물론 언관으로 재직하고 있는 중에라도 엄격한 기준의 적용을 받았다. 삼한갑족 가문출신이어야 하고 부인의 문벌조차도 고려해야 했으며 청요직을 배출한 가문이 선호되었다. 사헌부의 가장 낮은 직일지라도 의정부 삼정승과 양사 (사헌부, 사간원)의 관원들에 의해 투표로 선출되었다. 또한 국왕은 일체의 업무를 행할 때 반드시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 1인씩을 참 가시켜야만 했다. 즉 양사의 관원은 왕을 마주보는 자리인 승지 뒤, 사관 옆에 앉아서 지켜보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정책심의 과정을 직접 참관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후에 보고들은 바를 각 자의 아문에 보고하고 그에 관해 검토하게 되며, 반대의견에 이르게 될 경우 간언에 착수하게 된다. 이는 정책결정 과정 자체기 비판을 주된 임무로 삼는 인사들에게 투명하게 공개되고 있었음을 의미하 는 것이다(최희수, 2006: 163).

후에 성종 대에 이르면 본래 국왕의 정책 자문기구였던 홍문관이 대간을 탄핵할 수 있는 지위로 격상된다. “홍문관은 공론이 있는 곳”, 혹은 “홍문관은 재상과 다름없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대간 에 대한 견제기능이 강화되어 대신의 행위는 대간이 논박하고 대간 은 홍문관이 논박하는 구조가 갖추어 지게 된다. 이는 언론 삼사(사 간원, 사헌부, 홍문관)간에도 효과적인 상호견제와 공조가 이루어지 고 있음을 의미한다. 때론 대간이 홍문관의 지지를 등에 업고 강력 한 간쟁활동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언로삼사의 주된 역할은 공론을 전달하고 공론에 입각한 정책결정을 유도하는 일이다. 공론이란 오늘날의 이해에 의하면 국민의 이익과 관심이 걸 린 문제에 대한 국민적 논의 및 이를 통한 보편적 합의의 도출과정, 즉 여론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당시의 신분구조 상 공론이 논의 되는 장은 소수의 파워엘리트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지 만 적어도 이들 간에 평등한 토론을 통하여 의사를 합일시킴으로써 공론을 정립했다는 점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공론이 확정되는 과정에 백성들의 삶이 있는 그대로 전달될 수 기회도 종종 있었음 은 물론이다. 조선시대에도 국가나 정치권력이 ‘공론’을 떠나서는 그 정통성을 내세울 수 없을 거라고 여기고, 그에 대한 대책으로 조선 시대에는 국사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사소한 일일지라도 ‘공론’을 살 피려고 하고, 소수의 사적인 의견을 통해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현대의 ‘여론정치’와 일맥상통하는 기본 원리를 지켰던 것이다. 이렇 듯 현대사회의 ‘여론정치’의 원리는 조선시대를 통해 확고히 형성되 었으며, 정착된 유교적인 언론문화의 핵심 이념으로 자리 잡고 있었 던 것이다(곽선혜, 2013: 286).

이처럼 조선왕조의 소통적 국가제도는 백성들의 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국가의 통치구조나 백성들의 사회적 삶은 물론 일정 부분 가정 내의 일조 차도 공의 영역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공의 영역은 누구나가 문제를 인식하고 개선해 함께 그 결과를 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12)(강혜종, 2013: 414). 즉 조선왕조의 섬세하게 발달한 견제와 균형 감시 의 시스템은 소통을 원활히 하고 분명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조선시대 소송제도에서의 소통구조

V.

소송제도의 일반적 특성

1.

소송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흔히 소송은 크게 보아 말하는 민사 소송부터 형사소송, 행정소송 및 헌법소송 등으로 구분된다. 이 중 조선시대의 법제도와 비교 할 수 있는 제도는 형사소송과 민사소송 이다. 여기서는 민사소송만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조선시대의 민사소 송제도와 비교해 보겠다.

민사소송은 법 분야 중 매우 긴 역사를 갖고 있다. 물물교환이 이 루어지던 까마득한 시절부터 거래의 분쟁이 있었을 것이고 그 분쟁 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방식이 정립되어 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민사사건은 형사사건에 비해 전 인류에 일반화된 보편적 특징 을 지닌다. 즉 민사 분쟁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 을지언정 사건 당사자의 주체적 해결을 도모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 해서 민사사건은 불법성이나 위해성의 정도가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칠 만큼 심각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한 당사자 간에 해결 되기를 바란다. 즉 당사자의 요구가 없으면 국가기관이 그 사건을 인지했다고 할지라도 전혀 개입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적지 않은 민사사건이 법정으로 오기 전에 주변의 도움으로 조정과 화해를 통해 해결된다고 볼 수 있다. 민사사건이 지니고 있는 이러 한 특징은 전체주의 국가가 아닌 한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확 인할 수 있는 유사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소송절차와 재판관 할이 분명하게 명시된 성문법을 갖고 있는 오늘날은 전통사회와는 다른 엄격성과 형식성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민사소송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거래 당사자 간 채무의 이행을 최고 했음에도 채무불이행등으로 인해 손해가 발 생하게 되면 피해자는 채무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게 된다. 우리 민법은 처분권주의에 입각해 소송의 개시와 심판의 범위, 그리고 언 제쯤 종결할 것인지를 결정함에 양 당사자 간의 합의에 따르게 한 다. 이는 사적 자치(私的自治)의 원칙에 따른 일반적 모습이다. 당사 자 변론주의에 입각하여 판결의 기초가 될 사실은 당사자가 주장해 야하고, 또한 당사자는 다툼이 있는 사실에 관해 그 사실을 증명할 증거를 법원에 제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우선 원고는 제일 먼저 소장을 써서 이를 법원에 접수 한다. 소장 에는 청구인의 청구취지와 청구인과 피고인의 인적사항을 쓰고 어 떠한 법적 근거로 그 권리를 주장하는지,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증 거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기재하여 법원에 접수한 다. 이때 만약 소장에 부족한 부분이 있거나 증거가 보완될 필요가 있다면 법원은 보완을 지시하고 최종 접수된 소장의 부본을 피고에 게 송달한다. 피고는 그 내용에 대해 이의가 있으면 반박하는 내용 의 답변서를 정해진 기일 내에 제출해야 한다. 만약 반박하는 내용 이 아니고 모든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바로 판결이 진행 된다. 통상 법정에서 변론이 개시되기 전 이처럼 문서를 통한 논박이 진행되며 법원은 기본적인 입장이 개진되었다고 생각되면 개정하여 사실관계 를 분명히 하기 위한 변론을 진행시킨다. 몇 차례의 변론을 통해 조 정이 가능할 경우 조정절차를 거쳐 합의에 이르면 판결 전에 모든 것이 종결된다. 조정이 되지 않을 경우 판결을 하게 되며 2 주 이내 에 항소 할 수 있다. 물론 판결 후에 피고가 판결내용을 잘 이행하 면 그뿐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강제집행 절차가 진행된다. 이 경 우 집행기관은 판결기관 이외의 기관이다. 채무이행이 진행되지 않 는 요건이 갖추어지고 집행의 신청이 있으면 당연히 강제집행절차 가 개시된다.

당사자주의를 원칙으로 하고 있음에도 현행 민사소송원칙은 변론 과정이 법원의 직권에 의해 진행되며, 무엇보다도 형사와 민사를 엄 격히 구분한다는 원칙에 따라 강제집행의 구제절차가 별도의 기관 에 위탁됨으로써 원고는 이중적 절차를 밟아야 하는 복잡성을 보이 고 있다.

조선시대의 소송구조

2.

조선시대의 재판은 대체로 일원화 되어 있었지만 성격상 형사법 정과 민사법정을 구별하고 있는 경우도 종종 눈에 띤다. 형사재판은 옥송(獄訟) 또는 상얼(詳讞)이라고 했으며, 민사재판은 사송(詞訟) 또 는 소송(訴訟)이라고 하여 민사재판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그 진행 과정을 청송(聽訟) 또는 청리(聽理)라고 했다. 조선 초부터 송사의 남용을 막기 위하여 익명으로 한 것은 청리하지 아니하였다. “사송 (詞訟)”은 문서로써 고소하고 말로써 다투는 것으로서 당사자가 서 로 구술로 분쟁사실의 진상을 남김없이 주장하고, 관이 이를 처리하 는 것이며, 그 소송의 내용은 주로 상속, 부동산, 노비, 소비대차 등 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는 아직 민사와 형사의 구분 개념이 없던 시기이므로 모든 재판이 순수한 민사소송은 아니며 형사소송 적 성격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재판이 형벌을 부과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즉 사송이 끝난 뒤에는, 재산을 회복시켜 준 뒤에, 행위의 반사회성을 형벌로써 다스린 것이다. 이처럼 조선 시대의 재판은 민사와 형사 사건을 병합처리 하는 방식으로서 상당 히 경제적이고 효과적인 절차라고 평가할 수 있으며, 장래의 분쟁을 예방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우병창, 2016: 65-67). 소송의 진행 과정은 다음과 같다.

소송을 먼저 제기한 자가 “원(元)”이 되고 그 상대방은 “척(隻)”이 된다. 소송능력은 모두에게 인정되었다. 상민이 양반을 상대로 소를 제기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심지어 노비가 주인을 상대로 소를 제 기할 수도 있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법정에서 세우는 대송(代 訟)도 허용 되었다. 다만 4촌 이내의 근친 간의 소송은 금지되었다. 그리고 여럿이 공동으로도 하는 소송(同訟)도 가능했다.

소송의 제기는 구술 또는 서면으로 하였으며, 소장은 소지(所志) 또는 소지단자(所志單子)라고 하였다. 소지는 일정한 형식이 있어서 형식요건을 구비하지 못한 소장은 접수하지 않았다. 이때 부실한 소 장위에 퇴(退)자를 쓴다. ‘퇴짜를 맞았다’는 용례는 여기서 비롯된 것 이다. 소장에는 주소, 성명, 원고의 사인(手決 혹은 手寸 signature)을 기재하고, 본문에는 소의 청구취지 (청구원인)와 증거를 제시한 후 끝에 연월일을 기재하였다.

원고는 소장을 관에 접수한 후에 스스로 피고를 출정시켜야 했으 며 피고가 출정하여 원고와 피고 모두 이제부터 소송에 성실히 임 하고 그 결과에 승복하겠다는 ‘다짐’(시송다짐始訟侤音)을 한다. 그 형식은 “저희들이 소송한 것을 각일(各日)의 다짐(侤音)을 상고하여 관식(官式)에 따라 처분하여 주십시요”로 형식화 되어 있다. ‘시송다 짐’은 재판절차의 시작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충분한 변론이 끝나 서 재판관에게 판결을 요구할 때도 ‘결송다짐(結訟侤音)’을 해야 한 다. ‘다짐한다.’는 용례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재판의 개시 와 종결이 모두 양 당사자의 합의에 따랐다. 소송이 개시되면 변론 이 시작된다(임상혁, 2000: 53 이하).

변론은 구두변론이 원칙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문서로써 대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증거를 제출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했다. 심리가 진행되는 동안 양 당사자는 제한 없이 변론할 할 수 있어서 법정은 내내 소란스러웠다. 변론은 단순하게 마구잡이로 자기주장만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새로 반포된 『수교집록(受敎輯錄)』의 규정을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즉 양 당사자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줄 법령을 찾아내어 근거로 제시하는 일도 흔했다. 이처럼 당시의 법정은 오늘날 보다 활기차고 진지했으며 전 문적인 정보가 소통되는 장소였다. 그만큼 법정은 시끄럽고 어수선 했다. 심지어 이 자리에 재판관이 있나 싶을 정도로 자유롭게 변론 할 수 있었다.

재판관은 인적사항이나 기초적인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질문 을 하고 그에 대한 당사자의 장황한 답변을 모두 심리기록에 적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심리진행 시 재판관의 역할은 오늘날과는 매우 달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판결이 내려지는 형식 또한 양 당사자 가 모든 진술을 마치고 판결해 줄 것을 요청하여 이루어지는 형식 으로 되어 있다. 즉 재판관은 ‘결송다짐’을 받고 나서야 결정할 수 있었다. 당사자의 이러한 권리를 침해하여 강제로 화해를 시킨 송관 을 처벌한 예도 확인된다.

판결은 증거를 토대로 이루어진다. 증거는 물증, 특히 서증(書證) 과 증인진술(人證)이 있는데 서증을 무척 중요시 했다. 증인의 진술 은 서증보다 증명력을 약하게 취급한 듯하다. 그 때문에 증거조사는 재판의 향배를 가늠하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선조 때 간행된 『사 송류취(詞訟類聚)』에는 소송절차 상 증거를 인정하기 위한 상세한 지침이 다음과 같이 마련되어 있다13)(詞訟類聚 聽訟式, 임상혁, 2000; 58, 우병창, 2016: 71). <그림 1>

  • 사건의 실정을 심문 한다(사건의 내용을 진술시킨다).

  • 증거문서를 제출시킨 다.

  • 증거문서를 조사 검 열한 뒤에 봉인하고 원고와 피고가 그 봉함에 서명하게 하 고 ‘다짐’(서약서)을 받은 다음 문서를 본 주인에게 돌려준다.

  • 문서는 후일 다시 제출시킬 때는 또 다시 문초(問招)하여 다짐문(文) 을 받고 개봉한다.

  • 문서의 선후를 조사하고 공부(公簿)에 등록 되었는가 아닌가를 조사 한다.

  • 형식을 어겨 입안을 받았는지 즉 관의 증명이 규정에 어긋나지는 않 는지를 살핀다.(노예관계이면 장예원의, 가옥·전답관계이면 한성부 의 증명을 받았는가, 재주(財主)의 거주처가 아닌 곳의 관사에서 월 권하여 증명한 것이 아닌가? 등).

  • 소정의 제소기한이 지난 것이 아닌가?

  • 법에 비추어 권한이 없는 자가 재산을 증여한 것이 아닌가(부모나 외조부모가 아닌 자가 증여한 것은 아닌가, 첩의 부모라든가 부(夫) 나 처첩이 재산을 증여한 경우 등).

  • 조사할 수 있는 문서를 비교 대조한다.

  • 증거문서를 발라붙이거나 긁어 지운 곳은 없는가.

  • 관의 증인(證印)을 받은 뒤에 글자를 더 써 넣은 것은 없는가.

  • 증인과 집필자(執筆者)는 법대로 친족과 현관(顯官)이 하였는가 아닌 가를 조사한다.

  • 부인의 서명인적(書名印跡)을 증거 조사 한다.

  • 印이 찍힌 증거문서를 작성한 연월과 재주가 사망한 연월을 서로 맞 춰 본다.

  • 증거문서작성연월과 재주가 퇴직한 월일과 다른 가 같은가, 다른 관 사에서 작성한 문서를 가져다가 문서를 붙여 연결한 곳에 간사한 위 조가 있는가, 다짐과 같은가 아닌가 하는 등을 자세히 조사하고 관 의 증명문서에 있는 당시의 처리한 당상관과 낭청관(郎廳官)의 재관 연월 및 성명과 인장을 조사한다.

  • 노비에 관한 사건은 그의 부모 및 그들 형제자매로서 출생의 순서와 성명이 증거문서와 같은가 틀리는가를 조사한다.

  • 가옥은 통기(通紀)를, 전답은 긍기(衿記)를 참고한다.

  • 소장을 제출한 일자, 당해 문서에 관이 증명해준 일자, 인증하여 준 일자, 관의 증명문서를 작성해준 일자, 모든 작성된 문서 중의 다짐 둔 일자와 국기일(國忌日) 및 사고로 공사처리를 하지 못한 일자를 조사한다.

  • 지방에 거주하는 자로서 귀농하기 위하여 정송(停訟)한 때에 작성한 문서에는 원고와 피고가 동봉하고 다짐 둔 곳 위에 서명 날인하였는 가를 조사한다.

<그림 1>

조선시대의 소송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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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고 시끄러운 변론이 수차례 있고 나서 양 당사자는 ‘결송다 짐’을 하고 재판관에게 판결해 줄 것을 요청한다. 판결에 불복할 경 우 정해진 절차에 따라 상소할 수 있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웃 고을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다. 요는 조선시대의 재판 정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모습을 보 이고 있다. 이는 막힘없는 소통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 우 리 선조들의 지혜였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노상소송

3.

소통을 중시한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자신의 억울함 을 호소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앞서 보았듯이 노비조차 자기 주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을 만큼 소통문화를 통 치의 중요한 환경으로 생각한 조선왕조는 엄격함과 형식성을 요하 는 소송조차 특례를 두고 있다. 노상소송은 늘 있었던 것은 아니지 만 경우에 따라 이런 상황을 효과적으로 활용해야 되는 신분계층도 있었다. 노상송사는 오늘날로 치면 약식 즉결재판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그림은 1778년 초 젊은 시절 서른네 살의 단원 김홍도가 풍속과 세태를 그린 8폭 병풍 중의 하나다. 거나하게 취한 고을 사또와 억울한 사태를 해결해 달라는 노비의 읍소, 그리고 땅 바닥에 넙죽 엎드려 진술내용과 판결을 받아 적는 형리의 모습이 매우 현장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우리 선조님들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형식과 제도의 부족한 틈을 이런 식으로 소통시키는 지혜가 있었다. 당대의 사대부 화가였던 강세황의 화제가 이러한 의미와 분 위기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이재원은 작가적 상상력을 동원해 단원 (檀園)의 취중송사(醉中訟事)를 감상하는 정조의 흥분을 다음과 같이 그려내고 있다(이재원, 2016: 154 이하).

정조: “내가 보고 싶었던 그림 들이 바로 이것이다. 놀라는 얼굴 표정을 곁에서 보는 듯하고 밥 한술과 한 사발 탁주에 만족해하 는 너털웃음 소리가 생생히 들리 는 것 같구나. 길거리에서 송사를 벌이는 장면에서는 어떤 판결이 내려지는지 한번 참견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이처럼 서로 부대끼며 백성들과 함께 살아가 는 수령이 있으니 과인이 바라던 바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움직 임까지 이토록 자세히 읽어내고 그려내다니, 마치 백성들이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 같구나. 더욱이 표암이 유려한 필치로 느 낌까지 적었으니 그 강평이 날카 롭게 풍자되어 읽어보는 재미 또 한 쏠쏠하기만 하다.” <그림 2>

<그림 2>

김홍도 행려충속도 중 취중송사(국립중앙박물관 제공)

img/JSTC-21-129_F2.jpg

강세황: “전하께서 풍속화를 보시고 이리 즐거워해주시니 소 신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이 노상송사의 핵심은 형리에 두고 있사옵니다. 갓을 삐딱하게 쓴 것으로 보아 취기가 어느 정도 올라 있는 모양이옵니다. 수령이 탄 가마 앞뒤로 수행인들이 물건을 이고 지고 있어 행색이 초라하지 않으나 판결문을 적고 있는 형리는 취 기가 오른 듯해 판결문을 기술하는 맡은 바 소임을 다할 수는 있을 까 걱정되어 조금 강평을 하였사옵니다.”

맺음말

VI.

공감과 소통 배려의 문제는 갑자기 제기된 오늘날의 사회문제는 아니다. 이는 인류의 진화 역사와 함께 해온 기나긴 역사를 지니고 있는 사회문제다. 인류가 4만년 이래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인류학 자들의 견해를 따른다면 오늘날 인간이 보여 주고 있는 다양하고 신기한 극단적 심리구조는 그 역사가 자못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현대에 와서야 나타난 병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처음 등장한 사물에 보이는 인간의 반응이 새로운 듯이 보일뿐 이지 이는 결국 잠재되어 있던 인간의 보편적 본성의 발로인 것이 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조선 시대로 가서도 아무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고 조선시대의 누군가가 현대에 와서 살게 되어도 역시 마찬 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문제를 효과적으로 잘 처리해 대처했 던 과거의 역사에서 지혜와 원리를 빌어 현실에 적응하려는 노력은 언제나 소홀히 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우리가 언제나 과거의 역사를 거울로 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조선왕조는 통치자 혹은 통치 집단의 권력독점을 제한하기 위한 각종 권력견제장치가 잘 마련되어 있었고 대개의 경우 이러한 장치 는 별 문제없이 잘 기능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현실의 문제는 다양 한 경로를 통해 상부에 보고되었고 권력담당자들은 의도적으로 이 러한 통로를 차단할 수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심지어는 국왕 의 권력독점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를 국왕 자신이 제안하고 준수하 는 모습도 종종 눈에 띤다. 이는 국가체제의 항구적 존속을 위한 최 선의 길이 바로 이와 같은 권력의 적절한 안배를 통해 현실의 문제 를 정확히 진단하고 처방해 대처하는 길이라는 점을 잘 알 고 있었 다는 의미다. 즉 백성들 삶이 풍요롭고 안정되어야 왕조도 지속될 수 있다는 점을 통치 집단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조 선왕조 전반기는 공감과 소통의 구조가 잘 기능하고 있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처럼 국가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되는, 더 정확하게는 어떠한 헌법적 근거도 없는 청와대에 집중되고 있는 초헌법적인 이상한 현상은 존재할 수 없었다. 이는 지금의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시사하고 있는 부분이다.

사법제도 또한 오늘날과 많은 점에서 유사한 듯 하지만 상이한 면도 많았다. 조선시대의 사법제도는 우선 재판관에 대한 과도한 권 력집중을 허용하지 않았다. 본문에서는 밝히지 못했지만 조선시대의 재판관은 형량의 언도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법률적용에서도 자신의 자의가 행사될 수 있는 여지가 무척 좁았다. 그리고 판결은 언제나 재검토되며 그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었다. 몇 해 전 신문에 보 도되었듯이 게으른 판사가 단 3줄로 판결이유서를 쓰는 경우는 조 선시대라면 도대체 존재할 수 없었다. 이는 오늘날의 재판관에게 “헌법 및 법률과 자신의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헌법규 정의 과도한 보호막 속에서 나타난 권력독점의 한 형태다. 즉 판사 는 자신의 불성실한 재판 혹은 심지어 오판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물을 수 없고 양심의 가책을 느낄 이유도 없어 보인다.

20세가 넘은 피해자는 성기는 물론 항문조차 절제해서 배변 줄을 옆에 차고 수시로 화장실에서 이를 쏟아버리는 힘겨운 삶을 살고 있음에도, 가해자인 목사 조두순은 곧 있으면 출소한다고 한다. 아 마도 이름을 개명하고 다시 거룩한 목사님의 삶을 살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판결은 조선시대라면 가히 상상도 못할 것이다. 조선 시대의 법제도는 매우 지극히 상식에 맞게 만들어져 상식에 맞게 기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판관은 자신이 내린 판결에 대한 책임 에서 끝까지 벗어날 수 없었다. 즉 언제든 다시 문제 삼을 수 있었 다. 그러나 조두순 사건을 판결한 판사가 누군지 우리는 잘 알지 못 하며 그 판사는 피해자의 지난한 삶에 어떠한 책임도 양심의 가책 도 없이 잘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가능했던 것들이 과학과 정보와 기술이 넘쳐나는 오늘날에는 왜 불가능한 것일까? 권력집단은 문제를 공감은 하되 소통을 막아버림으로써 의도적으로 집단이익 추구에 전념하기 때문 이다. 그들에게서 소통은 당해 딥단 내에서의 소통이요 사회 전체의 소통을 통한 투명성을 엄폐함으로써 이익을 공유하고 공고히 하며 안정적으로 지속시킨다. 더구나 그 집단이 장악한 언론을 은폐시킨 채 소통을 정당화 시키게 되면 이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 게 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자행되는 정치보복의 악순환은 시대정 신에 대한 공감의 불일치, 소통의 부재, 그리고 상대에 대한 배려심 의 전무에서 비롯되는 지극히 저급한 병리적 현상이다. 극소수 집단 의 이러한 병폐가 전체의 문제로 오인되는 것이 바로 소통의 진정 한 문제인 것이다.

Notes

[1]『郭店楚墓竹簡』 『性命自出』 “凡人雖有性, 心亡奠志, 待物而后作, 待悅而后 行, 待習而后奠. (中略). 道始于情, 情生于性. 始者近情, 終者近義. 知情者能出 之, 知義者能內(入)之. 好惡, 性也. 所好所惡, 物也. 善不善性也, 所善所不 善, 勢也. 凡性為主, 物取之也.”

[2]『世宗實錄』 1년 8월 12일 上語河演曰: “予未知人物, 欲與左右議政、吏兵曹堂上, 同議除授.”

[3]『世宗實錄』 18년 4월 12일 “今依太祖成憲, 六曹各以所職, 皆先稟於議政府, 議政 府商度可否, 然後啓聞取旨, 還下六曹施行, 唯吏兵曹除授、兵曹用軍、刑曹死囚外 刑決, 仍令本曹直啓施行, 隨卽報于政府. 如有未當, 政府從而審駁, 更啓施行. 如 此則庶合古者專任宰相之意.”

[4]『世宗實錄』 12년 3월 5일 “命自政府六曹各司及京中前銜各品, 各道監司守令品官, 以至閭閻小民, 悉訪可否以聞”

[5]『世宗實錄』 24년 6월 16일 “予卽位以來, 謂爲政莫若勤勵, 乃行常參朝啓輪對, 日接群臣, 凡庶務無不親決, 故刑獄無滯, 庶事不廢.”

[6]『論語』, 里仁,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7]『明道文集』, 권3, 答橫渠先生定性書, “夫天地之常, 以其心普萬物而無心; 聖人之 常, 以其情順萬事而無情. 故君子之學, 莫若廓然而大公, 物來而順應.”

[8]『河南程氏遺書』, 卷15, “視聽言動非理不爲, 卽是禮. 禮卽是理也. 不是天理便是 私欲, 人雖有意於爲善, 亦是非禮”

[9]물론 사적영역이 모두 不善인 것은 아니듯이 공적 영역이 모두 선한 것만은 아니다. 『退溪全書』, 二, 卷二十五, 答鄭子中別紙, “只如今人言公事私事之類, 公 事非必皆善私事非必皆惡, 但以官家事屬公共, 故謂公事民間事屬私獨故謂之私 事耳.”

[10]『太祖實錄』 1년 11월 9일 “諫官上書言, 臣等竊謂公論者, 天下國家之元氣也. 諫 諍爲公論之根柢, 佞諛爲公論之蟊賊有國家者, 常培其根柢, 而去其蟊賊, 則讜論 正議, 日進於前, 而甘言卑辭, 不聞於耳矣.”

[11]『三峯集』 권 10 『經濟文鑑』 下 諫官“獨宰相可行之諫官可言之爾諫官雖卑. 與宰相等. 天子曰不可. 宰相曰可. 天子曰然. 宰相曰不然. 坐乎廟堂之上. 與 天子相可否者. 宰相也. 天子曰是. 諫官曰不是. 天子曰必行. 諫官曰必不行. 立乎殿陛之前. 與天子爭是非者. 諫官也. 宰相專行其道. 諫官專行其言. 言行 道亦行也. 九卿百執事. 守一職者. 任一職之責. 宰相諫官. 繫天下之事. 亦任天下之責”

[12]강혜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축적된 해석의 묶음’은 사건으로 발생된 어 떠한 감정의 ‘해소’를 위해 수렴된 과정, 혹은 사건의 발생으로부터 해결에 이르 기까지 생성된 다양한 감정들의 산물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는 다양한 ‘공감 경쟁’들이 등장하는데, 이 경쟁에서의 승리는 곧 가장 지배 규범적 가치에 부합하는 ‘공감’으로 인정받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3]『詞訟類聚』 聽訟455쪽 이하 법제처 1965.

이재룡

은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회학과 같은 대학 대학원 법학과에 서 석사 박사를 마치고 지금은 충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기초법 교 수로 재직하고 있다. 동양법철학이 주요 연구분야이며 법철학 법사상사 법사회학 등의 과목을 강의 하고 있다. 저서 『조선 예의 사상에서 법의 통치까지』 등이 있으며 “『大學』 格物致知格物攷” 등의 동양법철학에 관 한 여러 논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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