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Information

Article Information


틱낫한의 ‘Interbeing’ 관점으로 보는 개신교 재해석: 성육신, 원수사랑, 예배*

 

Abstract

본 논문은 한국 개신교의 성육신, 원수사랑, 예배의 의미를 틱낫한의 ‘상호존재’(interbeing)의 시각으로 재조명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상호 존재’는 달라이라마와 더불어 세계 2대 성불로 존경 받는 베트남의 선승 틱낫한이 불교의 전통적 개념인 연기(緣起)와 공(空)을 대중친화적인 현 대적 용어로 순화한 용어이다. 전통적인 서양의 신학구조는 하느님을 저 너머의 공간에 좌정해 있는 ‘존재’(being)로 상정하고 신과 세계, 초자연과 자연, 초월과 내재를 분리하여 파악하는 실체론과 이원론에 의거한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성육신, 원수사랑, 예배의 개념도 이원화된 방식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본고는 서양의 이원론의 구조에서가 아닌 틱낫한의 상호존재에 의지하여 성육신, 원수사랑, 예배를 비이원론적인 구조에서 새롭게 고찰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실체론과 이원론에 기초한 서양 전 통 신학의 성육신, 원수사랑, 예배의 요소에서는 함의되지 않은 새로운 의미를 틱낫한의 상호존재를 통해 찾아보고자 한다.

Translated Abstract

This paper aims to re-examine the meanings of incarnation, love of enemy and worship of Korean Protestant churches with the viewpoint of "interbeing" of Thich Nhat Hanh. "Interbeing" is a term refined by the venerable Thich Nhat Hanh of Vietnam, who is respected as the world's second holy Buddhism with the Dalai Lama, in terms of Buddhism's traditional concepts of dependent co-arising(緣起) and emptiness(空) in a popular and friendly modern term. The traditional Western Christianity is based on the dualism and the substantialism that sees God as a 'being' that are left outside and sees God and the world, the supernatural and nature, the transcendence and the immanence separately. In such a theological structure, the concepts of incarnation, love of enemies, and worship are to be understood in a dualized way. In this paper, we will examine the incarnation, love of enemy and worship in a non-dualistic structure by relying on "interbeing" of Thich Nhat Hanh, not in the structure of the traditional Western dualism. Thus, we try to find a new meaning that is not implied in the elements of incarnation, love of enemy and worship of western traditional theology based on substantialism and dualism through "interbeing" of Thich Nhat Hanh.


시작하는 말

I.

일반적으로 셈족 계통의 종교 유형에 속한 그리스도교에서는 다 른 종교에 대한 이해가 협소하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 아래 예수 이외의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신념아래 이웃 종교 인들을 설득과 강압으로 개종시키려 한다(존 캅, 1988: 6). 특히 이런 현상은 그리스도교 가운데서도 개신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 이유는 개신교가 지닌 이원론적인 신학 구조 때문이다. 개신교의 신 학구조는 피안의 세계에 유일신을 상정해 놓고 궁극자의 계시에 의 해서만 신을 만나는 실체론과 이원론의 구조에 바탕한다. 구원과 진 리는 개신교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담보된다. 그로인해 개신교는 다른 종교인들, 특히 로마가 톨릭 교인까지도 개종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도를 넘은 개종주의와 강압주의, 공격적인 선교태도와 배타주의로 일관한다. 이들에게 선 교는 교회의 유지와 확장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처럼 실체론과 이원론에 기초한 개신교의 정통 신관은 유일신의 ‘계시’를 절대화 하고1)다른 종교 전통을 쉽게 폄훼한다. 그리고 이웃종교에 대한 올 바른 선 이해 없이 오로지 개신교의 교리와 신학으로 다른 종교를 재단하고 일반화 하려든다.

이러한 종교성향은 결국 유럽의 제국주의 정치 세력과 결탁함으 로써 아시아, 아프리카를 개신교화 하였고 그 지역의 종교와 문화가 지닌 전통과 의식을 침해하였다. 마침내 개신교의 이러한 제국주의 적, 공격적인 배타주의는 세계의 평화를 깨트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스 큉에 따르면, 세계 평화의 전제 조건은 종교 간의 평화이다. 종교 간 평화를 위한 첩경은 개신교가 독단적인 배타성을 내려놓고 이웃 종교를 포용하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 시작은 개신교 의 일방적인 시각에서만 아닌, 다른 종교와 더불어 개신교의 교리와 신학을 다시 들여다보는 것이다. 본고는 기존 서양의 신학적 요소들 을 대승불교적 관점으로 새롭게 고찰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유 럽 개신교의 전통 신학적 요소인 성육신, 원수사랑, 예배 등의 개념 을 베트남의 선승인 틱낫한의 상조존재의 관점으로 재조명하는 것 을 목적으로 한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개신교가 추구해온 신과 세 계, 초월과 내재 등을 구분하는 이원론적인 주객 도식적 방식이 아 니라 틱낫한의 상호존재를 통한 비이원론적인 시각으로 성육신, 원 수사랑, 그리고 예배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국내의 신학이나 종교신학 분야에서 이원론적 구조가 아니라 비이원론적인 관점으로 진행된 선행 연구는 매우 부 족하다. 그럼에도 몇 가지 눈에 띄는 연구를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틱낫한과 폴 니터의 “상호존재”(interbeing) 개념에 근거하여 상 호존재신론을 제시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신관을 탐구한 연구(김종만·유광석, 2018), 비이원론적인 상호존재신론의 관점에서 그리스도 교의 기도와 영성을 새롭게 조명한 연구(김종만·송재룡, 2018), 교회 와 세속의 이원론을 기독교 윤리적으로 비판한 연구(신경수, 2016), 여성주의자들의 관점에서 영성과 성(性)의 통합을 위해 유심론와 성 차별주의의 이원론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려는 연구(오광철, 2011), 도 덕경과 생태여성신학의 대화를 통해 가부장적 이원론의 극복을 시 도한 연구(구미정, 2006), 그리고 이원론에 근거한 신학적 사유를 극 복하기 위해 종교현상학을 생태학적인 관점으로 접근하여 연구한 논문(김대식, 2003) 등이 있다.

본고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틱낫한 이 제시한 상호존재가 무엇인지 그 정의를 논한다. 두 번째 부분은 상호존재의 시각인 비이원론의 방식으로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의미 를 재해석하는데, 이것은 다시 세 가지 세부 구조로 나누어진다. 우 선 첫 번째는 비이원론의 방식으로 이해되는 성육신의 의미를 논구 하고, 두 번째는 원수사랑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의미, 마지막은 이 원론이 아닌 비이원론의 관점으로 바라본 예배의 새로운 의미에 대 해 고찰한다.

결국 이 글은 개신교의 이원론이라는 자기 프레임에 갇힌 편협한 시각에서 틱낫한의 상호존재의 프레임을 통한 새로운 해석의 해방 을 추구한다. 그러면 특수성에서 보편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고 종교 간의 상호 이해에 한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특수성에서 보편성으로 나아간다고 해서 특수성이 해체된 보편성이 될 수는 없다. 보편성은 각 종교가 지니는 특수성 을 전제한다. 때문에 개신교는 자기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타자를 배 타하는 폐쇄적 자기 고백이 아니라 자기의 정체성을 고수하면서 타 자를 수용하는 개방적 자기 고백이어야 한다. 즉, 자기 고백은 지키 되 다른 종교의 관점을 수용하면서 개신교의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다.

틱낫한의 ‘상호존재’(Interbeing)론 개관

II.

달라이 라마와 더불어 세계 2대 성불로 존경받는 베트남 승려 틱 낫한은 불교의 전통적인 핵심 개념인 연기(緣起)와 공(空)을 현대적 용어인 ‘상호존재’(interbeing)로 재해석하여 새로운 신조어를 제시했 다.2) 상호존재는 틱낫한의 종교 사상의 핵심어로 고전적 불교개념 인 연기론을 현대인들의 언어 이해에 용이하게 순화된 대중적 용어 이다. 불교에서 연기(緣起)는 산스크리트어로 ‘pratitya-samutpada’, 팔 리어로는 ‘paticca-samuppda’로 ‘의존하여(pratitya) 함께(sam) 일어난다 (utpada)’는 뜻이다. 이 말은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하여 함께 일어나고 소멸하며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즉 일체의 사물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나며,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곽철환, 2003: 488-489). 틱낫한은 전통적 방식의 연기론은 일반 대중들이 소화하기 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모두가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독창적인 비유 로 설명한다.

만일 여러분들이 시인이라면 한 장의 종이 안에 구름이 떠다니는 것 을 볼 수 있습니다. 구름이 없다면, 비가 있을 수 없습니다. 비가 없다 면 나무가 자랄 수 없습니다. 나무가 없다면 종이를 만들 수 없습니다. 종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구름이 필수적입니다. 만일 구름이 여기 없 다면 종이 역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름과 종이는 상호존재 (inter-are)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상호존재(Interbeing)는 아직 사전에 없는 단어이지만, 만일 접두사 ‘inter’와 동사 ‘to be’를 결합하면 새로운 동사 ‘inter-be’가 탄생합니다.

(Thick Nhat Hanh, 1988: 3)

뿐만 아니라, 종이 한 장에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함께 공존한다. 거기엔 햇볕도 들어있고, 나무를 잘라 제지소로 운반하여 종이로 만 든 벌목꾼도 들어있고, 벌목꾼이 먹은 빵의 재료가 되는 밀도 들어 있고, 벌목꾼의 부모님도 종이 한 장 가운데 들어 있다. 즉, 종이 한 장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만물의 전부가 함께 존재해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틱낫한은 『반야심경』에서 관세음보살 (Avalokieshvara)을 통해 얇은 종이 한 장 안에 일체의 사물이 모두 들 어있다는 것은 만물이 비어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 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인 오온(五蘊)우리의 몸(色), 감각 (受), 지각(想), 정신작용(行), 의식(識)이 우리 모두 가운데 흐르는 강물처럼 실체가 없이 비어 있듯이, 독립된 자아란 존재하지 않고 비어 있다.

만일 우리가 모든 요소들 가운데 하나를 근원으로 돌려보내봅시다. 햇볕을 태양에게로 돌려보낸다면 종이 한 장이 존재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햇볕이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벌목꾼을 그 의 어머니에게로 돌려보낸다면, 우리는 역시 종이를 가질 수 없습니다. 종이 한 장은 종이 아닌 다른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만일 우리 가 종이 아닌 요소를 그들의 근원으로 돌려보낸다면, 종이 한 장은 여 기에 절대 존재 할 수 없습니다.

(Thick Nhat Hanh, 1988: 4-5)

만물이 모든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비어있다는 것이다. 그 러므로 틱낫한이 제시한 상호존재에 따르면, 일체의 사물은 다른 모 든 것들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지, 독립하여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이를 가리켜 틱낫한은 “존재하는 것은 상호 존재하는 것”이라고 역 설한다. 이 세상의 일체는 다른 사물과 공존 없이 독자적 실체를 가 지고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Thick Nhat Hanh, 1988: 4). 이처럼, 틱낫한이 제시한 전통 연기론의 현대적 표현인 상호존재를 다른 말 로 고치면 공(空)이다. 그는 나가르주나(龍樹)가 읊은 연기와 공에 관한 시(詩)에서 모든 현상은 인과 연에 의해 생겨나고 이것을 공이 라고 하고 말로는 미치는 못하는 가명(假名)을 공이라고 한다며 인 연으로 생겨난 모든 것은 공이고 어떤 것이든 연기적으로 성립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공하지 않은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틱낫한, 2013: 71-72, 151-152). 곧, 공은 존재론적인 없음을 의미하는 무(無)가 아니라 독립되고 분리된 자존적 개체가 없다는 말이다. 스위들러(Leonard Swidler)는 나가르주나가 제시한 연 기와 공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3)

2세기 용수는 어떤 자존적인 실체를 분명히 거부했으며, 시공의 어 떤 순간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나 조건 관계로 이루어져 있고 또한 이것들은 의존적으로 함께 일어난다고 보았다. 의존적으로 일어남을 우 리는 공이라고 부른다. 공은 의존하여 함께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공은 단순히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모든 실재의 궁극적 원천이라는 매우 적극적인 의미를 띈다.

(야기 세이이치·레너드 스위들러, 1996: 44-5).

나가르주나는 모든 것은 연기하여 발생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공 이며 모든 관계는 사물에 실체나 본질이 없는, 모든 것이 공이기 때 문에 성립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공은 독립된 개체가 분리되어 독존 적으로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관계성의 그물을 이루면서 언제나 끊이지 않고 유전, 생성한다. 이러한 공에 대한 이해는 공(空)의 산스크리트어의 어원에서 비롯된다. 공(sunyata) 은 산스크리트의 ‘슌야’(sunya)로 ‘증가한다(to swell)’, ‘확장한다(to expand)’라는 의미의 어원 ‘슈비(sbi)’에서 생성된 단어이다. 이는 존재 론적으로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무(無)가 아니라 모든 상이 상호 연 계된 상태에서 끊임없이 운동, 변화하는 존재의 성격을 가리키는 말 이다(양윤희, 2007: 248). 틱낫한도 공의 산스크리트어 어원 ‘순야 타’(sunyata)는 형용사 수냐(sunya)에서 파생된 말로 영(零), 무(無)를 뜻 하지만 여기서 공은 부정사의 의미로 사용된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무(無)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존재하는 것은 항구적으로 변하지 않는 자성, 실체, 자아라는 것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러 면서 모든 존재는 인과 연으로 생겨나 고정된 실체가 존재하지 않 기 때문에 공이라고 주장한다(틱낫한, 2013: 136).4)

요컨대, 상호존재에 대한 틱낫한의 이해는 다음과 같다: “사람이 든 물건이든,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생겨나 지속되는 것은 없다. 이 것은 저것에 의존하며, 하나의 것은 일어나고 지속되기 위해 또 다 른 것에 의존해야 한다. 이를 ‘연기성’이라 하며, 다른 말로 ‘어울려 있음Interbeing’ 또는 ‘무아’라고도 한다. ‘무아(無我)’는 ‘독립적으로 존재 하는 영원한 실체는 없다’는 뜻이다”(틱낫한, 2006: 137). 그러므로 신과 자연, 혹은 신과 인간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이적(不 二的)으로 존재한다. 이를 『반야심경』의 주제로 환언하면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色卽是空 空卽是色 色不異空 空不異 色)이다(김경재, 2010, 201-2). 이와 같이, 틱낫한은 불교의 전통 핵심 어인 사물의 독자적인 자아적 실체를 거부하고 무아, 무상에 근거한 만물의 상호의존성을 뜻하는 연기와 공의 현대적 언어인 상호존재 (interbeing)를 제시했다.

이와 달리 서양의 정통 신학은 변하지 않고 고정된 실체로서 절 대 공간을 차지하는 단순 정위(simple location)를 전제한다. 단순 정위 는 이데아, 실체, 물자체, 뉴턴의 입자,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학의 하느님이 여기에 해당한다: “단순정위란 물질이 다른 여러 존재에 대한 단순히 그러한 위치 관계를 갖는 것으로 기술될 수 있으며, 그 다른 여러 존재에 대한 유사한 위치 관계로 이루어지는 다른 여러 영역에 관련시켜 설명될 필요가 없다고 하는 특성이라는 것이다”(A. N. Whitehead, 1925; 김상일, 1993: 11에서 재인용). 서양신학은 별개 적 존재로서의 단순 정위에 기초한 실체론에 기대어 고정 불변하는 존재(being)의 하느님을 추구함으로써 신과 세계를 나누는 이원론에 귀착했다. 따라서 상호존재는 실체 혹은 본질을 전제 한 존재(being) 가 아닌 일체 사물의 상호의존성, 관계성이 함의된 개념이다. 그렇 기 때문에 초월과 내재, 신과 세계, 영혼과 육체가 이중적으로 구분 되는 이원론이 아니라 일체의 구별과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비이원 론을 가리킨다. 따라서 상호존재인 비이원론의 관점을 통해 기존 이 원론적 사고 양식에서 이해되는 개신교의 주요 신학적 요소인 성육 신, 원수사랑, 예배를 새로운 방식으로 조명해 볼 수 있다.

상호존재의 관점으로 본 개신교의 재해석

III.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성육신의 의미

1.

틱낫한은『내 손안에 부처의 손이 있네-틱낫한 스님의 법화경』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눈다.5) 전반부에서는 실존인물인 석가모니의 태어남, 성장과정, 출가수행을 통해 부처가 되는 일련의 과정을 묘 사함으로써 석가모니의 역사적 차원을 다룬다. 후반부에서는 궁극적 차원에 집중하여 시공간을 초월하여 온 곳에 편만한 법신6)으로서의 부처를 기술한다. 틱낫한은 법화경이 전하는 진리를 만나기 위해서 역사적 차원과 궁극적 차원을 동시에 알아야 한다고 진술한다: 우리 는 기원전 5세기 인도에서 태어나 진리를 향한 구도적 열정과 수행, 깨달음을 이루어 나가는 역사적 실존인물로서의 석가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인식을 넘어서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진리를 전하 는 법의 본질을 깨달아야 한다(틱낫한, 2008: 15).

틱낫한은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 었듯이 모든 사람은 역사적 차원의 일상에서 궁극적 차원의 진리와 자유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그는 궁극적 가치를 찾기 위해 다른 곳을 헤맬 필요 없이 “나무와 풀, 언덕, 산, 그리고 사람”이라는 역 사적 차원의 삶과 죽음의 세계 가운데 생과 사를 초월한 궁극적 차 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삶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우리는 두 차원 모두에 닿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는 물결과 같은 데, 우리는 그것을 ‘역사의 차원’이라고 부른다. 다른 하나는 물과 같다. 그것을 ‘궁극의 차원’ 또는 ‘니르바나’라고 부른다”(틱낫한, 2008: 15; 틱낫한, 2017: 12). 한발 더 나아가 틱낫한은 역사적 차원 과 궁극적 차원을 넘어 실천적 차원을 제안한다. 우리가 역사적 차 원에만 머물러 있다면 고귀한 진리와 자유의 세계 없이 욕계와 색 계7)에서 구속되어 살아 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차 원, 즉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일상 너머에 있는 궁극적 차원에 들어가 열반의 기쁨을 맛보아야 한다. 그러나 틱낫한은 궁극적 차원에 있으 면서도 그 궁극적 삶의 깨달음이 다시 우리의 일상에서 실천으로 구체화 되지 않으면 궁극의 깨달음이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차 원으로 격하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역사적 차원에서 궁극의 차원으 로 들어가고 다시 그 궁극성이 역사적 차원으로 환원되어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의 방편이 다름 아 닌 통찰과 수행을 통해 사회로 구현되는 사회 참여불교(Engaged Buddhism)이다.

틱낫한의 이런 생각은 징관(澄觀)이 『법계현경(法界玄鏡)』에서 제 시한 사종법계(四種法界)를 연상케 한다. 징관에 따르면, 우리가 감 각할 수 있는 현상세계는 사법계(事法界)이다. 여기서 약간의 영적 수양을 한 사람은 사법계인 현상세계가 실체성이 없다는 깨달음을 얻고 또 다른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이것은 이법계(理法界)에 해 당한다. 그러나 사법계와 이법계가 다른 세계가 아니라 사법계를 관 통하는 원리가 이법계이고 이법계의 구체적인 표현이 사법계로써 이 두 세계가 아무런 장애 없이 서로 들어감을 깨닫게 되는 이사무 애(理事無礙)를 체득한다. 징관이 말한 이법계와 사법계, 이사무애는 틱낫한에게 역사적 차원과 궁극적 차원으로 대비된다. 그러나 징관 도 틱낫한도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징관은 다시 이법계와 사법계만 서로 들어가는 것(相卽, 相入)이라면 이(理)가 바로 사(事)이고 사(事) 가 바로 이(理)이기 때문에 구체적 현상의 사물 까지도 아무런 장애 없이 상즉 상입 하는 세계, 즉 사사무애(事事無礙)가 이루어진다고 본다(오강남, 2007: 206-207). 사사무애는 틱낫한이 주창한 참여 불교 와 구조적 유사성을 지닌다. 틱낫한은 현상계인 사(事)의 세계에서 궁극적 차원인 이(理)의 세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고 역사적 차 원과 궁극적 차원을 넘어 다시 실천적 차원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틱낫한에게 참여불교는 사(事)와 이(理), 역사적 차원과 궁 극적 차원이 실천적 차원에서 실재화되고 사와 사 혹은 역사적 차 원과 역사적 차원이 구체적인 현실 가운데 역동적으로 작동되는 실 천성이다.

이는 유동식이 이해하는 세계관 개념과 유사하다. 그는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진 현상의 세계를 시공우주인 제 1우주로, 현상 세 계의 시공간을 초월한 저 너머의 세계를 영성우주인 제 2우주로, 그 리고 마지막은 예수의 성육신 사건으로 이 땅에 도래한 시공우주와 영성우주가 만나는 제 3우주로 구별한다(서공석, 2012: 198). 유동식 에게 예수의 성육신 사건의 의미는 현상세계인 제 1우주와 이 세계 를 넘어서 있는 제 2우주를 포월하여 하느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이 땅에 구현되는 사건으로 파악된다.

해방신학자 소브리노(Jon Sobrino)도 성육신을 이런 관점으로 해석 한다. 그는 지금 여기의 세계와 저기 너머의 세계를 이원적으로 구 분하지 않고 하나의 세계로 이해한다. 그는 예수의 성육신은 이 세 상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하느님의 우선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진 사 건으로 보고 영성을 초세간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세 간적인 오늘날의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 라틴 아메리카의 가난한 자 들이 해방되는 사건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소브리노는 예수가 가난 한 자들에게 둘러싸여 가난한 자들을 도우고 섬긴 것처럼 라틴아메

리카의 가난한 자들이 가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Ignacio Ellacutia·Jon Sobrino, 1993: 677-689). 종교해방신학자 폴 니터(Paul Knitter) 또한 성육신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한다. 그는 신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을 둘로 나뉘지 않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신적인 것을 역사적인 것으로 환원하지 않고 신적인 것을 찾거나 신적인 것의 일부가 되려면 역사와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긍정한다. 그러 면서 예수의 육화는 억눌리고 짓뭉개진 이들에 대한 사랑을 역사적 실천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고 역설한다(폴 니터, 2008, 148, 151-152). 니터는 초월적 요소는 직접 다가 갈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매 개를 통해 도달할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소브리노의 말을 인용한 다: “… 역사적인 실제 삶 없이 영적 삶을 살 수 없다. 영이 육이 되지 않으면 영적으로 사는 것을 불가능하다”(Sobrino, 1988: 4; 폴 니터, 2008: 149에서 재인용). 이처럼, 소브리노와 니터의 성육신 이해 는 틱낫한의 역사적 차원과 궁극적 차원을 넘어 실천적 차원으로 나아가자는 인식과 징관의 이사무애의 원리와 유동식의 제 3 우주 론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상술한 대로, 틱낫한, 징관, 소브리노, 니터, 유동식이 제안한 개념 들은 결국 언어적 표상만 틀릴 뿐 이들의 공통된 주요 사상은 성육 신 사건, 즉 요한복음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4)와 상통한다. 여기서 ‘말씀’이란 헬라어 ‘로고스’(λογος)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말이었다. 그러나 고대 유대인들에게 ‘말씀’은 유대교적 사고체계와 용어인 ‘다바르’(רבד)로 이해되었다. 구 약성서에서 하느님은 ‘다바르’(רבד)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했다. 하느 님의 다바르(רבד)를 맡은 예언자들은 온전한 정신 상태를 유지한 채 그 뜻을 전달했다.8) 그러므로 하느님은 사람들이 이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인간과 소통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인 ‘다바르’는 단순 히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축복의 말이나 듣기 싫은 몇 마디 저주의 말이 아니었다. ‘다바르’는 좋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거나 구 체적인 재앙이나 위험이 내포된 그 자체로 힘 있는 것이었다. 다바 르는 하느님의 힘으로서의 말이 인간 안에 전해 질수 있고, 나아가 그러한 힘으로서의 말이 그 말의 힘에 근거해 사물도 생겨날 수 있 었다: “하느님이 그저 ‘말’을 함으로써 세상이 생겨나게 되었다. 빛 이 있으라(창1:3), 야훼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을 받았다(시33:6)”(유 동식, 1978: 21; 이찬수, 2014, 152-153). 이처럼, 다바르는 유대교의 분위기와는 다른 헬레니즘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생소한 것이었지만 헬레니스트들에게 ‘다바르’는 자신들의 언어 문법인 ‘로고스’ 대치되 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태초에 말씀(logos)가 있었고 그 말씀이 하 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같은 분이셨던 것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헬레니즘 철학은 신의 초월성을 강조했고 여기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초월적인 신과 인간을 연결 짓는 중간 존재로 지혜 혹은 말(로고스)을 연상했다. 여기서 말은 점차 초월적인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의 중재자로 바뀌었고 유대 철학자 필로는 인간이 초월 자 하느님과 직접 접촉할 수 없기 때문에 말, 즉 로고스를 통해서 접촉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 로고스를 헬레니즘 유대인들은 아들, 형상, 그림자, 신, 하느님의 사자 등으로 파악했고 여기서 말 이 그리스도 차원으로 승화된 예수를 지칭하는 것이 되었다(이찬수, 2004: 153-154). 요한은 예수의 인격을 표현함에 있어 유대적 언어 표현이 아닌 그리스적인 로고스 언어 개념으로 대치하고 예수를 로 고스라고 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헬레니스트들은 “자기의 말과 사고 양식에 의하여 유대인들이 이해했던 예수를 이해할 수 있었다”(유동식, 1978: 21).

그러나 로고스가 육신이 된다는 말의 의미는 하느님의 뜻이 예수 에게 임하여 그가 고귀한 영적 사람으로 변모하여 속인(俗人)들이 감히 가까이 할 수 없는 영적 인간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는 자신이 하느님의 신적 속성을 분담한 신령한 존재로서의 신인(神人, God-man)임을 철저히 부인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예수에게 다가와 서 말하기를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예수는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 냐? 하느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9)(김경재, 2002: 94).

성육신은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잠시 인간 세상에 환생했다고 여기는 고대 신화적 세계관, 즉 사람 모습으로 변신하여 땅위를 걷 는 신 이해와는 차원적으로 틀리다. 예수는 하느님의 독생자 로고스 의 화육체이기 때문에 땅 위에서 보통의 사람들과 달리 인간으로서 의 어떠한 유혹, 고뇌, 번민, 그리고 아픔 등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 는 ‘신화적 그리스도론’의 예수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는 가난한 갈 릴리 농어촌에서 어린 유년 시절을 보내고 청년기 이후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피나는 노동을 했으며 혼란한 세상 가운데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깊이 사색하고 기도한 사람이었다(김경재, 2002: 95, 98). 즉 예수는 인간의 몸을 입고 환생한 신이 아니라 “인간의 말씀 과 행태, 곧 그의 전 존재가 하느님의 뜻과 혼연일체가 되어 살았던 분”이었다(김경재, 2002: 95).10)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의미 는 하느님의 말씀이 예수 안에서 완성되었고 “신적 이성과 같은 우 주적 원리를 가장 충실하게 살아낸 예수에 대한 존경과 경배의식이 함축되어 있”음을 말한다(이찬수, 2004: 154).

그것이 다름 아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성육신의 의미이다. 이처럼, 하느님이 인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오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 사건으로 세계는 새로운 세계가 전개된다. 인간 의 생활을 세속이라 하고 종교적 신성성과 구별했던 옛 세계가 완 전히 사라진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은 세속과 신성의 담이 무 너지고 “성속(聖俗)이 일여화(一如化)” 된 새로운 세계를 말한다. 성 속이 하나 된 세계 가운데 예수는 거룩한 종교인들과 교제한 것이 아니라 속인들과 죄인의 친구로 일상성을 살았다. 그리하여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판했다(유동식, 2006: 147).

상술한 바와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틱낫한이 말한 궁극적 차원, 징관이 설명한 이(理)의 세계, 유동식의 제 2우주, 틱낫 한의 역사적 차원과 징관의 사(事)의 세계, 유동식의 제 1우주로 대 비된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은 궁극적 차원이 역사적 차원으로, 이(理)의 세계가 사(事)의 세계, 제 2우주와 제 1우주가 제 3우주를 관통하여 우리의 일상 속에 함께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은 초월과 현실이 분리된 형이상학적인 추 상성과 영적인 면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틱 낫한의 표현처럼 역사적, 궁극적 차원을 넘어 실천적 차원으로 환원 되는 구체성이며, 징관이 표현한 사사무애 세계와 같이 말씀이 우리 의 일상 속을 관통하여 구체적인 행위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뜻이 우리의 삶을 초월한 너머에 있지 않 고 우리의 행위로 나타나는 그것이 바로 성육신의 핵심이다. 행위로 귀결되지 않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실재가 될 수 없다. 우리 삶의 일상인 역사적인 차원(틱낫한), 현상계(징관), 제 1우주(유동식) 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행동으로 편만하게 나타나는 것이 성육신이 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일상의 모든 삶에서 성육신을 체현할 수 있 다. 우리가 겪는 모든 일상 가운데 하느님의 말씀으로 들어가고 다 시 우리의 일상으로 말씀과 함께 구현되는 존재가 된다면 예수가 이룬 성육신을 우리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현실적 존재인 우리에게 성육신은 한편으로는 일상에서 모두를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즉 원수에 대한 사랑까지도 수용 가능한 비제의 적 통로가 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만인에 대한 사랑이 종교적으 로 승화되어 나오는 예배라는 제의적 통로로 이어질 수 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 사랑의 의미

2.

틱낫한은 인간이 버려야 할 첫 번째 관념이 ‘자아’라고 말한다. 그 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생김새나 몸을 보고 ‘이 몸은 나다’, ‘이 몸은 나의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나는 존재한다’는 관념에 지배당한 다. 그러나 인간에게 ‘나는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대신 ‘나 는 연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홀 로 존재할 수 있는 개체는 없고 우리 모두는 부모, 조상, 음식, 물, 공기, 지구 등 우주의 어느 것 하나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혹은 ‘나는 ~이다’라는 자아의 관념을 폐기하 지 않으면 안 된다(틱낫한, 2016: 17-18). 그래서 틱낫한은 나는 존재 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은 화신11)가운 데 세상을 초월하여 여기저기 흘러 다니는 구름처럼 세상 곳곳을 현현하여 누빌 수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틱낫한이 불교의 연기와 공 개념을 현대적으로 환언하여 조어한 자신의 종교사상의 핵심인 상호존재는 비이원성과 공성(空 性)12)을 토대로 한다. 공은 세상의 모든 것은 고유하고 영구불변하 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세상에 독립적으로 존재하거나 고정된 것이 없고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원인과 조건, 즉 인연에 따라 생겨난다(틱낫한, 2014: 24-25). 그래서 부처는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없다는 ‘무생무사’(無生無死)를 설파했다. 마찬가지로 18세기 프 랑스의 과학자 라부아지에도 “없어지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참 성품은 무생무사이다. 사물은 조건이 충분히 갖추어지면 형태화 되고 그것을 존재라고 한다. 그것을 이루는 조건 중에 한두 개 가 사라지면 사물은 이전과 동일한 형태를 갖추지 못하는데 그것을 비 존재라고 한다. 어떤 사물이 ‘존재한다’ 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정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우주에는 ‘완전히 존재하는 것’도 ‘완전히 존 재하지 않는 것’도 없다. 하늘에 나타나는 구름 한 조각은 새롭게 형태 화 되어 출현한 것이다. 구름의 형태를 갖추기 전에 구름은 바다에서 태양열을 받아 생성된 수증기였다. 수증기는 구름의 전생이라 할 수 있 다. 한 장의 종이를 깊이 보면 거기서 나무를 보고, 또 나무에 자양분 을 공급한 흙, 해와 비, 구름을 보고, 더하여 벌목꾼과 종이공장을 볼 수 있다. 종이 한 장의 형태를 가진 것은 단지 새로운 형태화를 취한 것이다. 그것을 태어났다고 할 수 없다. 태어남은 없다. 오직 연속이 있 을 뿐이다. 그것이 만물의 성품이다. 그러므로 종이 한 장의 성품은 ‘무 생무사’이다. 종이 한 장이 죽는 것은 불가능하다. 종이 한 장을 태우면 연기, 증기, 재, 열로 변한다. 그 종이는 다른 형태로 연속하는 것이다.

(틱낫한 2013: 76-81)

이처럼, 무생무사의 관점으로 보면 이 세상 모든 것은 상호 연 기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 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다. 나의 존재 근거는 너이고 너의 존재 근거는 나이다. ‘나’라는 형태를 갖추고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것의 존재로 인해 ‘나’라는 형태가 그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 러므로 우리 모두는 너와 나에 대한 구별 없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너를 사랑하는 것이고 너를 사랑하는 것이 나에 대한 사랑이 된다. 이와 같이 틱낫한의 화신과 무생무사의 관점으로 파악된 연기와 공 의 묘사는 모두 비이원성에 의한 틱낫한의 현대적 표현인 상호존재 에서 연원한다. 상호존재의 시각으로 미루어 보면, 우리가 사랑하지 않아야 할 것이 없게 된다. 이는 성서의 구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로 이어진다. 이 두 구절은 나와 너, 나와 이웃, 나와 원수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구조에서는 불 가능 하지만 틱낫한의 비이원성의 구조인 상호존재의 시각에서는 가능하다.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 틱낫한은 다음의 비유를 통해 제시 한다.

… 그들이 당신을 산처럼 높은 증오와 폭력으로 내리쳐도 마치 당신 을 벌레 취급하며 짓밟아 뭉개도 당신의 팔을 자르고 내장을 꺼내도 기억하세요, 형제여. 꼭 기억하세요. 그는 당신의 적이 아닙니다. 그대 에게 가치 있는 것은 오직 자비뿐. 정복할 수 없는 무한의 무조건적인 자비뿐. 증오로는 결코 야수와 맞설 수 없습니다. …

(틱낫한, 2003: 127-128)

분노와 폭력은 또 다른 분노와 폭력을 낳을 뿐이며, 결국 모두를 공 멸에 이르게 합니다. 폭력과 증오를 불식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자비 심과 사랑뿐입니다. 분노와 자비심을 잠재우고 보다 현명한 대처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상호 존재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폭력 을 가하면 결국 그 폭력이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틱낫한, 2014: 233)

틱낫한은 우리 모두가 상호존재이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폭력은 바로 나에 대한 폭력이므로 폭력이 아닌 사랑과 자비심으로 모두를 끌어안아야 된다고 말한다. 이처럼, 틱낫한에게 원수 까지도 사랑 할 수 있게 만드는 상호존재의 인식 바탕에는 자비와 사랑이 있다. 사랑이 기초 되면 무엇을 해치지 않도록 지켜주는 힘이 된다. 사랑 이 발동하면 우리 속에 있는 무서운 살심(殺心)이라는 분노가 사라 진다. 그러면 나와 너, 나의 것과 너의 것, 적군과 아군의 구별이 없 어지는 세상의 ‘온 생명’을 구현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와 다른 관점으로 원수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접 근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원수를 자신이나 가족, 동 료에게 폭력이나 살인 등의 심각한 피해를 입힌 외부인으로 간주한 다. 그러나 원수에 대한 개념을 상호존재를 통해 분별지(分別知)가 사라지는 형태로 이해하면 원수는 바깥에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원수는 바로 나 자신을 대상화(Object-I)하고 나를 다른 무언가로 구속하여 끊임없이 이방인(strangers)화 하려는 의지이다. 사람들이 나 자신을 이방인화 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남들에 비해 소유하지 못한 것과 무지로 인한 열등의식, 무언가를 성취하지 못한 것에 대한 무능력, 게으름, 어리석음 등으로 자신을 이방인화 한다. 또한 억제하지 못하는 욕망에 대한 죄책감과 남들에 게 입은 상처, 무시, 폭력으로 인한 미움과 증오를 이방인화하고 남 들에 대한 증오, 시기, 질투로 자신을 이방인화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이방인으로 만들면서 이렇게 분류된 또 다른 나의 자아를 원수로 만들어 버린다. 그럼으로 네 원수를 사랑 하라는 말은 다름 아닌 나를 스스로 이방인화 함으로써 또 다른 나 의 자아를 부정하는 자기부정(self-denial)을 그만 두라는 표현의 다른 말이다. 즉 ‘네 원수’는 바깥의 누군가가 아니라 자기를 대상화하고 이방인화 하는 자기 자신의 ‘자기부정’이다. 이러한 자기 부정을 틱 낫한은 우리 속에 있는 “상처받은 아이”로 묘사한다. 그는 우리가 숨을 내쉬고 들이실 때 마다 자기 자신이 부정해 버린 또 다른 자 아인 상처받은 아이에게 돌아가서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를 포 용해야 한다고 말한다(Thich Nhat Hanh 2002: 35). 그러므로 우리에 게 있는 고통, 갈등, 분노, 열등감, 죄책감, 무지, 게으름, 무능력, 증 오심 같은 것들은 오물을 처리하듯 폐기하거나 개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오히려 그런 것들이 참 된 나에 이르게 하는 안내자가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바로 ‘나’ 자신 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로너간(Bernard Lonergan)은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죄책감을 객관화하고, 죄책감을 하 나의 객관적 개념으로 설정한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은 죄책 감을 인간에게 부정적인 요소로 단정하며 죄책감을 인간 주체와 분리 해서 연구한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한 인간 주체가 죄책감을 자기 자 신과 분리 된 것(object)으로 받아들이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할 때 자연 발생하는 죄책감은 자연스런 내면적 인식으 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변희선, 2014: 42-52)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이런 것들을 대상화하여 부정적인 것으 로 이방인화하고 원수로 치부할 필요가 없다. 그런 것들이 구성적으 로 나를 존재케 하는 요소가 아니라 그들의 현존이 다름 아닌 나의 존재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틱낫한은 나 자신을 분리된 나 로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내가 존재 전체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고 말한다(Thich Nhat Hanh, 2002: 19).

그런 점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원수는 외부에 있는 누군가나 또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나를 대상화하여 괴롭히는 나 의 이방인들이다. 이것을 틱낫한은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깨닫는데 장애가 되었던 부정적인 자기상(self-image)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설 명한다(틱낫한, 2014: 306). 따라서 틱낫한의 비이원적 이해방식인 상 호존재의 시각으로 보면 원수사랑은 나와 너를 이원화하여 타인을 대상화, 사물화 함으로써 상대를 배타하는 존재로 만들거나 자기 자 신까지도 대상화, 이방인화 함으로써 자기를 부정하는 개별적 존재 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일체의 사물이 영구불변하는 독립된 자성이 없이 모든 것이 인과 연으로 생성 소멸하는 온 생명 과 같이 만물이 서로 함께 숨을 쉬고 있는 생명 그물망으로 얽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수사랑은 자(自)와 타(他)의 이원 화나 자기의 이원화도 사라지는 차원에서 구현될 수 있다.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 예배의 의미

3.

예배(禮拜)는 “신을 신앙하고 숭배하면서 그 대상을 경배하는 행 위 및 그 양식”이다. 예배는 히브리어로 ‘아바드’(דבע), ‘샤하’(החש), 헬 라어는 ‘레이투르기아’(λειτουργία), ‘프로스퀴네오’(προςκυνέω), 영어 는 ‘워십’(worship)13)등으로 표현된다(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2001: 26-31). 히브리어 ‘아바드’(דבע)는 ‘봉사’, ‘섬김’, ‘일하다’는 뜻으로, 종 이 주인을 섬기듯이 인간이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행위이다. 예 배의 영어 표현인 ‘서비스’(service)는 ‘아바드’(דבע)와 관련이 있는데, 히브리어‘샤하’(החש)역시 ‘굴복하는 것’, ‘자신을 엎드리는 것’, ‘머리 숙여 경배하는 것’(창24:26, 출34:8)으로 종교적인 숭배, 순종, 봉사의 의미를 지닌다. 예배의 헬라어는 ‘프로스퀴네오’(προςκυνέω)로 “자세 를 낮추어 경배하다”, “누구의 손에 입을 맞추다”14)는 뜻이다. 다른 헬라어 ‘라트레이아’(λατρεία)는 ‘백성’이라는 ‘라오스’(λαός)와 ‘일’의 ‘에르곤’(ἔργον)의 합성어로 “백성을 위하여 일한다”, “사역,” “봉사하 다”, “섬기다”는 의미를 지닌다(정장복, 1994: 8-9; 한국복음주의실천 신학회, 2001: 16-7).

상술한 예배에 대한 설명들의 공통점은 “절하다”, “경배하다”, “굴 복하다”, “섬기다” 등으로 집약된다. 예배에 대한 이런 사고방식은 하느님을 저 너머, 초월적인 주체적 인격자로 상정하고 현실계의 인 간들이 경배를 드리는 형식을 띈 전형적인 이원론에 기초한다. 여기 서 예배는 세속과 신성성이 완전히 두 개의 차원으로 분리되어 세 상과 떨어진 채,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하느님과 특별한 만남이 가능한 종교적 피안의 매개체로 인식된다. 로빈슨에 따르면, 여기서 예배는 피안이 바로 여기, 우리 삶의 중심,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 이에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우리 한 가운데 있는 피안을 제거하 고 신을 더 멀리 밀어내 버린다(존 로빈슨, 1999: 113-8 참고). 곧, 성 과 속이 완전히 분리된 채, 현실계의 인간이 초월계의 하느님에게 굴복, 순종한다. 이것은 초월의 영역인 피안과, 세속의 영역인 차안 이 완전히 다른 두 차원으로 분리, 이탈된 구조이다. 그러므로 신의 절대 타자성(The other)이 상정된 구원사와 세속사가 평행하는 것으 로 파악된다. 여기서 교회는 구원사 위에 떠 있는 배와 같고 세속사 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사에 떠 있는 배, 즉 교회에 승선함으로써 구 원을 이룰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논리는 결국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명제로 귀결된다.15)

그러나 틱낫한의 법화경은 상술한 전통예배와 달리 우리에게 예 배에 관한 새로운 의미를 조명하도록 도와준다. 틱낫한은 상호존재 적 시각에서 절하는 이와 절 받는 이를 둘로 나누지 않고 예불에 대한 태도를 정의한다.

불교 수행을 할 때, 우리는 불상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절을 올린다. … 우리는 절하는 이와 불상과의 관계를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절 하는 이는 누구이며, 절을 받는 불상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절만 한다면, 그 행위는 미신적인 행위로 흐르 기 쉽다. 붓다가 우리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외부의 대상에 불과하다면 저 불상 역시 그러할 것이다. 나는 여기 절 올리기 위해 서 있고, 불상 은 저기 단상 높은 곳에 앉아 있다.

(틱낫한, 2006: 64)

여기서 불교수행을 그리스도교 수행으로, 붓다 혹은 불상을 하느 님으로 바꾸면 성과 속이 분리된 서양의 전통적인 예배의 의미와 다른 예배의 이상을 추론할 수 있다. 곧, 예배는 성과 속이 분리되 거나 예배하는 자와 예배 받는 자가 나누어진 이원론이 아니라 둘 이 하나인 성속일여의 비이원론이다. 이원론이 아닌 상호존재에 기 초한 비이원적인 예배는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의 제 사법인 향아설위법(向我設位法)과도 맥락적으로 동일하다. 해월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제사는 단순한 추모 행사가 아니라 인류가 지닌 모든 사상과 문화가 하나의 의례 안에 압축된 것이라며 향벽설위법 (向壁設位法)의 제사가 아닌 향아설위법의 제사를 제안 한다: “이전 에 우리 인류가 행해 왔던 향벽설위식의 제사는 저 벽 쪽에, 시간적 으로는 미래에 신이나 천국, 혹은 약속의 땅, 낙원이 있다는 식의 구조를 담고 있는 의례이다. 이러한 구조는 자신이 열심히 일해 얻 어 낸 결과를 벽을 향해 놓고 모든 희망을 미래에 투사시킴으로써 중요한 오늘을 희생한다는 의미를 깔고 있다는 것이 선천 시대 제 사에 대한 해석이다”(최준식, 2012: 459). 즉, 향벽설위법의 제사가 성속이 구분된 서양 전통의 이원론적인 예배 방식이라고 한다면 향아설위법의 제사는 상조존재에 기초한 성속일여의 비이원론적인 예배 방식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로빈슨(John Arthur Thomas Robinson)은 예배를 성(聖)과 속(俗)을 분리하고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도피하거나 세 속적인 영역에서 종교적인 영역으로 은퇴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 즉 일상에서 거룩성의 깊이16)를 만나고 이런 깊이에 우리를 개방하 여 언제나 모든 곳에서 사랑과 화해의 추구로 참여하는 행위로 파 악한다(존 로빈슨, 1984: 113-4). 그래서 로빈슨은 예배의 진부(眞否)를 평가하는 기준은 우리가 “우리 한 가운데 있는 피안, 배고픈 자와 헐 벗은 자와 집 없는 자와 옥에 갇힌 자 안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얼마나 더 민감하게 하느냐”에 있다며 “우리가 예배 행위에 참여함으 로써 그런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를 더 알아보게 되는 경우에만 그 예배가 기독교의 옷을 입힌 종교성의 산물이 아니라, 진정한 기독교 적 예배가 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존 로빈슨, 1984: 117).

예배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이찬수의 관점으로 환원하면 “일상의 카이로스화”이다. 그는 일상적으로 흘러가는 수평적이고 연대기적 시 간을 크로노스, 하늘의 뜻이 드러나는 의미 있는 수직적인 시간을 카이로스로 규정하고 “크로노스가 의미 없이 그저 일상적으로 자동 적으로 흘러들어가는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특별한 어떤 일이 벌 어지고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지나 가고 사라지는 달력속의 시간이 아니라 일상에서 특별한 의미를 깨 닫고 사는 사람들에게 카이로스는 지속된다(이찬수, 2014: 211-215). 그러므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는 세속의 영역인 크로노스와 초월적 영역인 카이로스로 나눠진 두 차원이 아니라 크로노스 안에 카이로 스가 내포된 하나의 비이원론 차원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예배는 일상의 카이로스화가 실현되는 것이 다. 따라서 신과 세계의 이원적 분리를 전제하여 예배를 통해 저 너 머의 신에게 자신의 소망을 투사하거나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체험 하려는 정통예배와 달리 틱낫한의 상조존재의 관점으로 재조명된 예배는 피안의 영역에 있는 신과 차안의 영역에 있는 인간이 분리 되지 않고, 세속과 신성이 분리되지 않고, 절하는 이와 절 받는 이 가 분리되지 않는다. 이 예배는 피안 속에 차안이 있고 차안 속에 피안이 있는, 공이 색이요, 색이 공인 세계, 이사무애(理事無碍) 혹은 사사무애(事事無碍)의 세계에서 구별과 차별이 없는 온 생명을 지향 하는 카이로스가 일상화 되는 것, 즉 카이로스의 사랑이 역동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행위이다.

나가는 말: 정리와 평가

IV.

종교학의 창시자 막스 밀러는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각각 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속성을 공유하고 있 다. 단지 시대와 문명, 문화, 역사, 환경, 그리고 언어에 따라 각 종 교가 가지는 특수성에 함의된 표상이 다르게 나타날 뿐이다. 그래서 하나의 종교만 알고 이웃종교를 모르는 것은 종교의 보편성은 간과 하고 특수성에만 골몰하는 형색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종교만 아는 협소한 종교이해에 빠져 있으면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와 배려에 인색하게 된다. 그러면 타종교를 열등한 종교로 취급할 가능성이 높 아지고 종교를 서열화, 계급화하려는 성향에 경도되기 싶다. 전술하 였듯이, 이런 경향성은 개신교에서 가장 두드러지는데, 그 이유는 개신교의 본향인 서양 신학이 지닌 태생적 구조인 이원론 때문인 것으로 진단했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개신교가 지닌 이런 경향성, 즉 이원론적인 신학 구조를 지양하고 새로운 신학적 의미 가능성을 찾기 위해 대 승불교의 관점을 차용하였다. 그 가운데서 특히 틱낫한이 불교의 전 통적 개념인 연기와 공을 현대적 용어로 재해석하여 제시한 상호존 재에 의거하여 비이원론적인 방식으로 개신교의 성육신, 원수사랑, 예배의 개념을 재조명하였다. 그런 점에서 본고는 한국 개신교에 다 음과 같은 전환적 인식의 계기가 되는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우선 성육신에서는 이원론적인 신학 구조에 기초한 전통 그리스도교의 성육신 사건은 하향적 그리스도론에 무게를 둔다. 즉 초월적 존재인 신령한 하느님이 인간 예수의 몸을 입고 이 땅으로 강림하여 인간 예수가 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비이원론에 기초한 상호존재의 시각에서 바라본 성육신 사건은 상향적 그리스도론에 무게를 둔다. 예수는 하늘 위의 신이 땅으로 내려와 신인(God-man)이 된 것이 아 니라 모든 곳에 편재한 영을 예수가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그 하느 님의 영을 일상 가운데 체현한 인간이었다.17) 둘째, 원수사랑에서 이원론에 기초한 원수사랑은 자와 타의 분리를 전제로 대상화된 너 를 사랑하는 구조를 띄기 때문에 완전한 사랑이 될 수 없다. 여기서 사랑은 여전히 나와 분리된 너가 전제된 사랑이기 때문에 사물화 되고 객체화된 사랑일 수밖에 없다. 반면 상호존재에 기반한 비이원 론적인 원수사랑은 자와 타, 주체와 객체의 구별이 해체된 나-너가 아닌 온 생명에 기반 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물화 되거나 객체화 된 사랑이 될 수 없다. 셋째, 예배의 의미에서 이원론적인 서양 정 통예배는 예배를 드리는 자와 예배를 받는 신이 구별된다. 여기서 예배는 주는 쪽과 받는 쪽의 거래 관계로 변질되거나 예배를 공간 적으로는 저 곳에, 시간적으로는 미래에 투사함으로써 현재성이 배 제되는 탈속화(脫俗化)가 일어날 수 있다. 탈속화 된 예배에서는 성 (聖)의 세계를 속(俗)의 세계로 잠시 초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속의 세계에 잠시 초대된 성의 세계가 사라지면 일상에서 이루어지 는 역동적인 예배가 거세된다. 그러나 비이원론적인 상호존재의 시 각으로 재해석된 예배는 속의 세계에 성의 세계가 잠시 초대되는 것이 아니라, 차안과 피안, 성과 속이 분리되지 않은 성속일여(聖俗 一如), 이즉일(二卽一)이며, 예배를 받는 자와 드리는 자의 구별이 사라진 일상이 예배이며 예배가 일상(日常卽禮拜, 禮拜卽日常)인 세 계가 구현된다. 여기서는 만물이 상즉(相卽) 상입(相入)하기 때문에 성과 속, 예배를 받는 자와 드리는 자의 구별이 더 이상 무의미해진 다. 그러면 여기가 아닌 저곳, 지금이 아닌 미래에 소망을 투사하는 의타적 신앙주의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따라서 상호존재의 시각으로 개신교의 의미를 새롭게 읽어내는 시도는 종교와 세속, 신과 세계, 차안과 피안을 구분하는 이원적 메 커니즘에 있지 않고 원효에 나타난 진속일여(眞俗一如)와 같은 비이 원적 메커니즘에 그 의의가 있다. 다음은 유동식이 파악한 원효의 진속일여를 인용함으로써 본고를 갈무리 하고자 한다: 원효에게는 일체가 개공(一切皆空)이요, 만물이 일심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에게 진과 속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사에 근본이 없고 부처와 중 생이 근본 하나이므로 성속의 구별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사찰에서 법의를 입고 염불하는 것이나 속복을 입고 대폿집에서 무애가를 부 르는 것 사이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그에게는 종교가 곧 일상생활 이요, 세속 생활이 곧 종교였다. 종교의 세계를 확대한 것이 아니라, 종교를 세속화함으로써 세계를 온통 종교화했다(유동식, 2006: 47).

Notes

[1]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서구의 그리스도교는 크게 세 가지 흐름 속에 전개된다. 첫째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영향을 받은 개신교 신학, 둘째는 아리스토텔레스 의 자연(physis)의 개념을 내면화 한 로마가톨릭 신학, 셋째는 신플라톤 사상에 기반을 둔 신비주의 신학이다. 첫째, 개신교 신학은 신앙유비(analogia fidei)에 바 탕 하여 신과 세계를 이원적으로 구분하고 인간의 전적 타락과 신의 절대 은총 을 강조한다. 둘째, 로마 가톨릭 신학은 존재유비(analogia entis)에 바탕 하여 위 로부터의 은총과 함께 아래로부터 신에 이르는 가능성을 인정한다. 마지막으로 신비신학은 신과 우주(세계)의 연속성,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을 신의 현현(顯現) 으로 보고 몸과 정신의 일치를 강조한다(변선환 아키브·동서종교신학연구편, 2007: 74-76참고). 개신교의 신앙유비와 로마가톨릭의 존재유비에 따른 신의 이 해는 신과 세계의 이원성이 극복되지 못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본고는 신과 세계를 나누지 않는 비이원성에서 논지를 증명한다는 점에서 신비주의 신학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2]본 논문의 주제어 가운데 하나인 ‘상호존재’와 상통하는 연구 주제는 서구의 유 교학자 로저 에임스(Roger T. Ames)의 ‘인간으로 되어감(human becoming)’이 있다. 자세한 이해를 위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라(류제동, 2016).

[3]스트렝(Frederick J. Streng)도 연기는 다름 아닌 공이라며 연기를 공의 다른 이름 으로 표현하고 가지야마 유이치 역시 공성이 연기라고 한 것은 대단히 중요한 선언으로, 연기하지 않고 발생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공이 아닌 사물은 아무 것도 없다고 역설한다(한스 발덴펠스, 1993: 59, 가지야마 유이치, 2012: 146).

[4]공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은 다음과 같다: 공은 용수시대의 공(sunya) 혹은 공성 (sunyata)의 산스크리트어로 그 어원은 ‘팽창하다’라는 ‘svi’에서 유래한다. 밖에서 보면 팽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내부가 비어있기 때문에 팽창은 동시에 공 허라는 표상과 결합된다. 공성을 상징하는 팽창과 공허라는 두 표상의 관계는 0이라는 수학적 기호에서 분명해진다. 이것은 그리스어로 ‘임신하다’(kyo), ‘체공’ (體空, kolia), 라틴어로는 ‘퇴적’(cumulus), ‘줄기’(caulis), ‘동굴’(cavus) 등이 되었다(한스 발덴펠스, 1993: 55).

[5]법화경은 총 28품으로 구성된다. 28품은 다시 전반부 14품과 후반부 14품으로 나눌 수 있다.

[6]불교의 삼신불(三身佛)은 화신불(化身佛), 보신불(報身佛), 법신불(法身佛)로 나뉜 다. 첫째 응신(應身)이라고도 하는 화신(化身, nirmanakaya, earthly body)은 ‘변신’을 뜻하는 ‘니르마나’(nirmana)와 ‘신체’를 의미하는 ‘카야’(kaya)의 결합어이다. 초기불 교를 지나 대승불교에서는 붓다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해서 나타나는 화신을 생각하게 되었다. 둘째, 보신(報身, sambhogakaya, heavenly body)은 수용신(受用身)이라고도 하며, 오랫동안 선생을 쌓고 수행하여 무량한 공덕을 갖추게 된 몸을 뜻한다. 그처럼 공덕을 갖추면 불신처럼 몸에 32상 80종 호가 나타난다. 붓다의 몸인 법신은 보신을 통해서만 세상에 나타날 수 있다. 셋째, 법신(法身, dharmakaya, truth body)은 ‘진신’(眞身)이라고도 하며, 무상은 생사윤회의 지배를 받는 육체나 형상화된 존재가 아니라 우주에 편만 하는 진리 자체를 말한다(켄 윌버, 2009: 62).

[7]삼계는 중생이 윤회하는 세 가지의 영역의 세계, 즉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 색계(無色界)를 가리킨다. 욕계는 우리가 사는 일반 세계로, 이곳의 중생들은 탐 욕과 분노,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독에 물들어 있다. 색계는 욕계보다는 정화 되어 애욕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물질에 대한 집착은 남아 있는 세계이다. 마지 막으로 무색계는 물질에 대한 집착마저 사라진 정신적인 세계이다. 이 가운데 색계와 무색계는 집착과 번뇌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운 영역이지만, 어차피 삼계 모두 윤회의 세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틱낫한, 2008: 64).

[8]그런 점에서 다바르에 의한 계시와 접신에 의한 계시는 구분된다. 전자에서 예 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맡아도 인간의 정신적 상태가 정상적으로 유지되었던 반면, 후자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일”(삼상10:6)에서 드러나듯이 정 상적인 정신 상태가 유지되지 않는다. 그래서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다바르에 의한 예언을 중요시 했다.

[9]막10:17-18, 마19:16-30, 눅18:18-30.

[10]역사적 예수가 인간적으로 가장 가까이 했던 베드로, 열두 제자, 그리고 훗날 그의 사상을 가장 잘 이해하고 전파한 사도 바울은 예수가 다윗의 혈통으로 태 어나고, 나사렛 동네에서 자란, 자기들과 똑같은 유대인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 을 가장 잘 인지했다.

[11]틱낫한은 모든 이가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관세음보살처럼 자비로운 화 신의 모습으로 현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양한 모습의 화신으로 현현해 어느 곳에서나 자비를 베풀 수 있습니다. 책을 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다양한 모습-책에 담긴 사상이나 표현-으로 현현해 세상 곳곳을 누빕니다. 내가 내놓은 모든 책들은 나의 화신들입니다. 나는 책의 모습으로 수도원에 들어가기도 하 고, 오디오 테이프의 모습으로 감옥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수많은 모습의 화신으로 현현할 수 있습니다.”(틱낫한, 2008: 245)

[12]공성(空性)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면 양자 물리학과 상대성 이론에 따라 설명할 수 있다. 이 두 이론에 따르면, 물질과 에너지는 상호 전환 될 수 있고 동등하 다. 원자 물리학은 더 이상 물질 개념을 다루지 않는다. 원자 내부에는 커다란 빈 공간이 있다. 그리고 소립자는 고도로 집중되고 안정된 상태에 있는 에너지 에 지나지 않는다. 물질은 단지 경향적으로 존재 할 뿐이다. 아인슈타인의 공식 은 물질과 에너지가 기본적으로 같은 현실의 두 가지 측면임을 의미한다(레오나르도 보프, 1996: 46).

[13]예배의 영어 단어는 ‘워십’(worthship)과 ‘서비스’(service)가 있는데 서비스는 히브 리어 ‘아바드’(דבע)와 관련이 있다. 한국어의 예배는 워십에서 번역한 말로, 워 십은 앵글로 색슨어 ‘워스사이프’(weorthscope)에서 나왔다. 이 단어는 ‘가치’를 의 미하는 ‘워스’(worth)와 ‘신분’을 의미하는 접미사 ‘십’(ship)의 합성어로 “존경과 존 귀를 받을 가치는 있는 존재”, 즉 “하느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이다(정장복, 1994: 9;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2001: 17-8).

[14]이 단어는 사단이 예수를 유혹할 때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4:10)는 예수의 말과 수가의 여인에게 “하느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요4:24)라는 예수의 말에서 사용되었다(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2001: 16).

[15]이처럼 구원사와 세속사를 분리하여 보는 것에 반대하는 신학이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이다.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에서는 구원사와 세속사가 둘이 아니라 하 나로서 세속사가 곧 구원사이고 구원사가 곧 세속사이다. 그러나 해방신학은 예수 사건을 유일회적으로 보는 반면, 민중신학은 예수 사건이 유일회적인 것 이 아니라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16]여기서 “깊이”는 공간적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상징을 나타 낸다.

[17]이것은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말이 아니다. 단지 예수의 인간성, 즉 역사적 현실 참여에 더 무게를 두는 예수의 측면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 점에서 니터 는 예수의 신성을 느끼고 선포하는 것은 그를 하느님의 성사로 만나고 나를 향 한 하느님의 참된 체현이자, 역사적 현실, 상징, 이야기로 만나는 것이고 예수 를 만나는 것은 살아 계신 신의 실재와 만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하 느님과 철저히 일치한 예수가 하느님과 나를 이어줄 수 있고 내 하느님일 수 있다고 말한다(니터, 2008: 163).

김종만

은 영남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고려대학교에서 한국사를 공부 하고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교회사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 종교학과에서 박사수료를 했으며, 현재 배재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연구 관심은 종교간 대화에 있으며, 특히 불교와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가 지고 후속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최근 논문으로 “‘상호존재신론’(interbeingtheism)- 틱낫한(Thich Nhat Hanh)과 폴 니터(Paul F. Knitter)의 인터빙(Interbeing) 개념을 중심으로”(공저, 2018), “상호존재신론에서 보는 기도와 영성: 새로 운 종교이해 전망을 위한 시론”(공저, 2018) 등이 있다.

참고문헌

1.

구미정 “가부장적 이원론의 극복을 위한 도덕경과 생태여성신 학의 대화” 《신학사상》 2006 2. 155-183

2.

김경재 《이름 없는 하느님》 삼인 2010

3.

김대식 “이원론 극복을 위한 신학적 사유의 전환과 생태학으로 서의 종교현상학” 《환경철학》 2003 2. 136-164

4.

김상일 《화이트헤드와 동양철학》 서광사 1993

5.

김선영 “루터의 여성관-영-육 이원론적 논법 대(對) 믿음과 사 랑의 논법-” 《한국교회사학회지》 2014 38. 49-87

6.

김종만 유광석 “‘상호존재신론’(interbeing-theism)틱낫한(Thick Nhat Hanh)과 폴 니터(Paul F. Knitter)의 인터빙(interbeing) 개념을 중심으로” 《신학과 사회》 2018 32. 137-180

7.

김종만 송재룡 “상호존재신론에서 보는 기도와 영성: 새로운 종교이해 전망을 위한 시론” 《사회사상과 문화》 2018 21. 87-127

8.

낫한 T. NhatHanh 《틱낫한의 비움》 2003 전세영 역중앙 M&B

9.

낫한 T. NhatHanh 《기도》 2006 김은희 역명진출판

10.

낫한 T. NhatHanh 《내 손안에 부처의 손이 있네틱낫한 스님 의 법화경》 2008 김순미 역예담

11.

낫한 T. NhatHanh 《오늘도 두려움 없이》 2013 진우기 역김영사

12.

낫한 T. NhatHanh 《중도란 무엇인가》 2016 유중 역사군자

13.

낫한 T. NhatHanh 《너는 이미 기적이다》 2017 이현주 역불광출판사

14.

니터 P.Knitter 《예수와 또 다른 이름들》 2008 유정원 역분도출판사

15.

로빈슨 J.Robinson 《신에게 솔직히》 1984 현영학 역대한기독교서회

16.

류제동 “유교와 불교의 상호이해 가능성의 기반에 관한 시론: 로저 에임스의 ‘인간으로 되어감(Human Becoming)’” 《공자학》 2016 30. 261-289

17.

변선환 아키브·동서종교신학연구편 《동서 종교의 만남과 그 미래》 모시는 사람들 2007

18.

변희선 《신학수행법 입문-버나드 로너간의 신학방법 연구》1 문학과 현실사 2014

19.

보프 L.Boff 《생태신학》 1996 김항섭 역가톨릭출판사

20.

서공석 《내가 믿는 부활: 삶의 신학 콜로키움》 대화문화아카데미 2012

21.

세이이치·스위들러《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다》 1996 이찬수 역분도출판사

22.

신경수 “기독교 전통에 나타난 교회와 세속의 이원론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비판: 플라톤의 이원론의 영향을 중심으로” 《기독교사회윤리》 2016 35. 219-249

23.

오강남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현암사 2007

24.

오광철 “영성과 성性의 통합: 유심론와 성차별주의의 이원론을 넘어-몸Body, 성별Gender, 성Sexuality에 관한 여성주의자들의 관점을 중심으로” 《신학과 선교》 2011 39. 39-62

25.

윌버 K.Wilber 《에덴을 넘어》 2009 조옥경·윤상일 역한언

26.

유동식 《한국 종교와 기독교》 2006 대한기독교서회

27.

유동식 《道와 로고스 宣敎와 韓國神學의 課題》 1978 대한기독교출판사

28.

최준식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 2 사계절 2012

29.

캅J J.Cobb 《과정신학과 불교》 1988 김상일 역대한기독교출판사

30.

황남엽 “이원론 연구: 바울과 예이츠를 중심으로” 《문학과 종교》 2016 21. 245-267

31.

EllacutiaIgnacio SobrinoJon Mysterium Liberations 1993 New YorkOrbis Books

32.

ThickNhat Hanh LevittPeter The Heart of Understanding: Commentaries on the Prajnaparamita Heart Sutra 1988 CaliforniaParallax Press

33.

ThickNhat Hanh Jean-Pierre CartierRachel The Joy of Full Consciousness 2002 BerkeleyNorth Atlantic Books

34.

Alfred NorthWhitehead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1925 New YorkThe Free Press


Article Information (continued)